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눈치 빠른 사람처럼 당신이 나를 읽고 머리카락을 쓸어주듯 한 장 한 장 자상하게 넘겨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날 보지 않고도 사랑에 빠질 거라고.
당신이 내게 밑줄 그어줬으면 좋겠다. 나라는 표시에 당신이 베이고 내게 포섭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며드는. 운명이 달리 있을까? 어쩔 도리 없이 녹아드는 것처럼 운명도 그런 형태겠지. 당해버리고 마는. 납득되고 마는. 외로움은 곧 자유라던데 하지만 난 자유가 싫다. 꼼짝없이 당신에게 갇히고 싶다.
가끔 내가 책을 좋아하는 만큼 스스로 강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건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슬프게도 당신은 그래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한테 잡아먹혔지. 나는 아픈 줄 모르게 아팠다. 당신을 떠올리면 시간을 헤집게 됐다. 빨래처럼 시간을 늘어놓고 이건 잘했어 이건 잘못했어 따지듯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게 됐다. 그만두자 싶다가도 돌아누우면 그 시간이 자꾸 귀를 잡아당겼다.
우리는 달랐을 뿐이야. 다르다는 것. 사람은 다 다른데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내가 잠시 착각을 했나? 내 사랑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아니 아니, 고개를 젓고. 나는 나처럼 네가 뒤를 돌아 나를 확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늘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게 아니라, 아니라, 아니란 말만 반복했었다. 가장 괴로운 기억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내 옆에서 빈손으로 서 있던 너를 보던 일. 나는 아무 말이나 좀 해봐라고 했고 너는 말없이 눈만 껌뻑였다. 나도 같이 서서 신호등처럼 불을 밝히고 깜빡이면 되는 일이었을까?
내가 쏜 화살이 돌고 돌아 내 등에 박혔을 때 분명 과녘을 보고 쏜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구나 알게 되고. 나는 그때 아닌 척 나를 쏘았구나. 화살을 빼고 붕대를 감고 나서야 깨닫는다. 미련한 나 가엾은 나 그렇지만 해 볼 만큼 해 본 나. 미련이 없는 나. 미련이 없어서 텅 빈 나. 그래서 외로운 나. 좀 더 나이를 먹고서야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원위치로 돌아온 것 만 해도 어디야. 위안하며 이마를 짚어보듯 나를 다시 확인했다.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어.”
“뭔데?”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는 이해가 안 가.”
“그게 왜? 말 그대로잖아.”
“매일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해보래 그러면 정말 사랑할 수 있대 그 말이 믿겨져?”
혹시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너를 사랑하지 못한 걸까? 방식은 달랐지만 난 나를 사랑했는데. 나를 사랑해서 너한테 싫은 소리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었나? 참 어렵다. 누가 묻는다면 사랑이 제일 어렵다고 말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일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모두.
그래서 내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책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무슨 이야기로 떠드는지 보려고. 거기서 진짜를 발견한다면 그 불같이 뜨거운 걸 꿀꺽 삼켜서 씹고 삼켜서 내 안에 덴 흔적처럼 남겨 놓으려고. 그러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네가 내 옆에서 사랑을 말하면 깊숙이 데었던 상처가 부풀어 오르고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네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사랑을 두 손으로 받아 내 왼 가슴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 텐데. 네가 짜증을 내건 화를 내건 심술을 부리건 관계없이 그게 진실로 사랑이라면 입 맞춰 줄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그렇지만 나는 나를 되돌려 놓았고 그 이유는 나를 사랑해서다. 사랑이 뭔지 그 뜻이 뭔지 칼을 들고 가르고 찢고 거꾸로 뒤집고 탈탈 털어보고 싶지만 그건 당장 할 수 없는 일.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떠올리면서, 알 수 없는 그것을 음미해 보면서 저 멀리 당신과 나란히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당신에게 말해주지 말아야지. 몰래 밤마다 울면서 썼던 일기장 맨 끝에 그 의미를 적어놔야지.
그렇게 마음먹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당신이 미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