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달러 자산 보유의 이유, 4. 미국 주식 시장의 '신용'
그럼, 이렇게 반문을 하실 겁니다.
“미국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원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손해가 아닌가요?”
질문 자체는 맞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1990년대 초반 원·달러 환율은 700~800원 수준이었습니다. 2025년 현재 환율은 약 1,390원대입니다.
30여 년 사이 환율이 거의 두 배가량 오른 셈입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는데, 왜 원화 가치는 오히려 하락했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뇌피셜)입니다.
대한민국 경제가 지금의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근면성실 덕분만은 아닙니다.
미국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원화 가치가 꾸준히 약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환율이 오를수록, 즉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한국 수출 기업의 경쟁력은 커집니다.
간단히 비교해보겠습니다.
환율이 1달러 = 1,000원일 때, 휴대폰을 1,000달러에 팔면 100만 원을 법니다.
환율이 1달러 = 2,000원일 때, 같은 휴대폰을 1,000달러에 팔면 200만 원을 법니다.
기업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달러로 들여오지만, 직원 인건비와 세금은 원화로 지급합니다. 그래서 원화 가치가 약해지면(환율이 오르면) 수출 기업은 오히려 유리해집니다. 달러로 번 돈을 원화로 바꿀 때 환차익이 커집니다. 반면 제품 가격은 낮춰도 이익이 그대로이니, 해외 시장에서 더 싸게 더 많이 팔 수 있습니다.
우리는 IMF 외환위기 이후 원화 약세를 늘 부정적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시 원·달러 환율은 1,800원에 육박했습니다. 원화가 크게 약세였던 만큼, 한국 기업에는 강력한 가격 경쟁력이 생겼습니다. 외국인들이 왜 망해가던 한국 기업의 주식을 사들였을까요? 바로 그 경쟁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원화 약세 덕분에 기업에는 새로운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그 시기에 한국 수출 기업들은 빠르게 경쟁력을 회복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가격 정책을 “이웃나라 죽이기(Beggar-thy-neighbor)” 라고 부릅니다. 자국 화폐를 약세로 만들어 수출 경쟁력(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문제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의 화폐가치 절하를 싫어합니다. 일본, 독일이 달러 강세를 이용해 자국의 가격 경쟁력을 높였을 때, 미국이 강제로 달러 가치를 낮추게 만든 것이 바로 ‘플라자 합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다릅니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한국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하며 “원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한국은 단 한 번도 실질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의 암묵적 동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전은 몇몇 장군이나 병사의 전투력이 아니라, 동맹국이 얼마나 강한 경제력으로 첨단 무기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의 환율이 일정 부분 약세를 유지하며 수출 경쟁력을 얻게 된 것은, 미국 입장에서도 동맹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또한, 한국 경제의 성장 둔화도 원화 약세에 주요 원인입니다. GDP 성장성을 따졌을 때 한국보다 미국의 성장성이 더 큽니다. 과거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 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인구 감소와 저성장 구조 탓에, 앞으로의 성장성이 미국 보다 훨씬 낮아진 겁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대한민국의 원화 가치는 앞으로도 상승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이 무너지면 달러 체제에 의존하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과 국제 무역, 안보 동맹이 동시에 흔들립니다. 즉, 미국이 무너지면 세계 전체가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무너지면, 결국 한국만 무너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주식투자를 접했을 때, 한 경제 컬럼리스트의 말에 홀려, 국내 주식에만 투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저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미국사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미국 기업에 투자하세요?
미국 정치 잘 아세요? 미국 기업에 대해 미국인들보다 더 잘 아세요? 모르잖아요. 네이버, 카카오, 삼성전자는 우리가 직접 그들의 재화와 서비스를 쓰잖아요. 좋은지, 나쁜지를 우리가 가장 먼저 알 수 있어요.
왜? 홈그라운드를 나두고서 자처해서 원정경기를 가세요. 제발 잘 모르는 미국 주식 말고, 이미 잘 알고
있는 국내 주식에 투자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기수법은 ‘틀린 말 하나 없이 상대를 자기 의도대로 홀리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맞는 말도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경험이 투자 판단의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휘발유를 보십시오.
우리는 매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습니다. 하지만 정유사의 주가를 움직이는 건 휘발유의 질이 아니라
국제 유가, 환율, 정제 마진 같은 거시 변수들입니다. 또 우리가 SK하이닉스의 HBM4 반도체 칩을 직접 써보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소비자의 경험은 투자 분석의 극히 일부일 뿐,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한국 주식을 사라고 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를 추측해본다면 ‘증권사의 이익’ 때문일 겁니다. 증권사는 매수와 매도 등 거래가 일어날 때마다 수수료를 챙깁니다. 물론 해외 주식을 거래해도 수수료는 발생합니다. 그러나 해외 거래는 현지 브로커와 나눠야 하고, 환전 과정까지 거쳐야 하니 증권사 입장에서는 순이익이 훨씬 적습니다. 또한, 초보 투자자는 해외 주식보다 국내 주식을 훨씬 자주 사고팝니다. 뉴스 한 줄, 테마 기사 하나에도 매매가 쏠리니, 증권사 입장에서는 수수료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또한, 미국 주식 시장은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사실 그곳은 전 세계 자금의 절반이 오가는 초대형 무대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홈그라운드가 아니니다. 반대로 국내 주식 시장은 수많은 인맥과 이해관계로 얽힌 ‘기관투자자들의 사냥터’와도 같습니다. 초보 투자자들이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들의 돈을 훨씬 쉽게 따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해외가 아닌 국내에 묶어 두려는 겁니다. 아마 그것이 진짜 목적일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전 세계 주식 자금의 절반 가까이가 미국에 몰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보다 훨씬 똑똑하고 성실한 투자자들이 자신의 돈 절반을 미국 시장에 맡기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여러분의 주식 자금 중 절반은 미국에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국과 미국 주식 시장의 질 자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첫째, 미국 가계의 금융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주식에 투자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인에게 주식은 단순한 투자 수단이 아니라 노후자금이자 연금이자 생계와 직결된 사회 안전망입니다. 그래서 주가가 폭락한다는 것은 곧 국민의 삶 자체가 흔들린다는 의미이고, 이는 정치적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야를 막론하고 미국 정부는 주가 방어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실제로 금융위기 때마다 정부는 막대한 구제금융을 쏟아부었고, 연준은 금리 정책을 통해 시장을 안정시켰습니다.
둘째, 금융법이 엄격합니다.
미국에서 내부자 거래는 살인죄에 준할 만큼 무겁게 다뤄집니다. 최대 20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고, 실제로 10년 넘게 복역한 사례도 많습니다. 반면 한국은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집행유예나 벌금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범죄라도 미국에선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한국에선 잠시 흔들리는 정도에 불과한 셈이죠. 결국 투자자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기업의 실적발표,
재무제표, 각종 공식 지표들의 진실성입니다. 이 지표들이 거짓 없이 작성되고 공개되는 것, 그것이 곧 시장의 신용입니다. 미국은 이 신용을 무너뜨리는 행위에 가혹할 만큼 큰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기업에서 발표하는 데이터를 믿고 투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의 신용은 집행유예와 벌금의 무게처럼 가볍습니다.
셋째, 유동성이 풍부합니다.
미국 증시는 단순히 크기만 한 시장이 아닙니다. 전 세계 자금의 절반 가까이가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누군가 주가를 억지로 끌어내리더라도 곧바로 글로벌 펀드들이 저가 매수에 나섭니다. 이른바 ‘바이 더 딥(Buy the dip)’ 현상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가가 급락하더라도 바닥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회복세를 탑니다.
반대로 한국 시장은 작은 풀(pool)에 불과합니다. 특정 세력의 매도세에 주가가 장기간 짓눌리거나, 테마주 하나에 시장 전체가 요동치는 경우가 흔합니다. 유동성이 얕으니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투자자들은 늘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미국 시장은 세계 자금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대양’과 같아, 어떤 파도가 쳐도 다시 균형을 찾습니다. 이 유동성이 장기 투자자들의 심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넷째, 주주 환원 문화가 뿌리내려 있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주가가 흔들리면 말로만 약속하지 않습니다. 직접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거나 배당을 늘리는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분기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해도, 이런 조치가 발표되면 투자자들은 “기업이 이익을 주주와 나눈다”는 신호를 받고 안도합니다. 주가는 급락 대신 방어선을 찾습니다. 실제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기업들은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꾸준히 매입·소각하고, 배당도 조금씩 늘려왔습니다. 이런 전통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는 실적이 일시적으로 흔들려도 주주 환원 정책이 ‘최후의 안전판’이 되어 줍니다.
반면 한국은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가 드물고, 하더라도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 차이가 투자자들이 미국 시장을 더 신뢰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물론 미국 주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닷컴버블이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처럼 주가가 장기간 지지부진했던 시기도 많습니다. 따라서 “미국에 투자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결국 시장을 꾸준히 관찰하고, 기업의 실적과 재무를 직접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다만 미국 시장은 위기 때마다 회복력을 보여주었고, 신뢰할 수 있는 제도와 자본의 힘으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시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펀더멘탈 투자자에게 미국 주식은 여전히 가장 믿을 만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