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이냐? 가스라이팅이냐?
제 글의 맹점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의 메커니즘』뿐 아니라 『도덕을 넘는 통찰』, 『부자의 내 탓』 같은 글들도, 읽는 이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바보는 없습니다. 나의 안하무인은, 이 세상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저의 주식 선생님도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15세를 넘긴 사람을 지속적으로 속이기란 불가능합니다.”
또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메커니즘도 한몫합니다.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근면 성실한 젊은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이유는 동정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나온 성공의 궤적을 뒤따라오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생산적 향상이 아니라 감정적 승리에 집착합니다.
생산적 우월감 : “나는 오늘 10시간 공부 루틴을 지켰다. 되더라. 나도 하니까.”
허위적 우월감 : “나는 10시간이나 공부했는데, 저 사람은 고작 5시간이네. 끈기가 부족하네.”
전자는 자기 성장에서 생긴 우월감이고, 후자는 타인을 깎아내릴 때 생긴 우월감입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 부류를 피하고, 나 역시 이 거짓된 우월감에 속지 않기 위해 하나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가르침은 진리를 통해, 상대의 영혼이 자유로워지길 바라고
가스라이팅은 진리를 통해, 상대의 영혼이 내 손안에 있길 바란다.”
이를 구체적인 4가지 사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원수를 사랑하라”
한 아이가 친구에게 얼굴을 맞아서 씩씩대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착한 자녀라면 원수도 사랑해야 한단다. 이번에는 네가 참아보렴.”
하지만 다음 날, 아이는 돌멩이로 친구의 이마를 때립니다. 이를 본 선생님이 몹시 화를 냅니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어? 왜 선생님 말을 안 들어? 넌 왜 이렇게 폭력적이니?”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입장도 아이의 입장도 없습니다. 권위를 위협받은 선생님의 입장만 있습니다. 이것은 가스라이팅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가장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사람은 바로 너란다.
그 미움이 네 마음을 파괴하기 전에, 네 안에 사랑을 키우렴.”
예수님은 아이의 영혼이 상처와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불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인생의 주인 되기’입니다. 열반 직전,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너희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너희 자신을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임제 스님은 내가 의존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속에서 죽이라고 외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그런데 다단계 업자가 소위 '호구'를 낚을 때, 작업 말미에 쓰는 마법의 대사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건가요? 본인 성인 아닌가요? 이 일을 하든 말든 저는 신경 안 씁니다. 하지만 이제 어른이세요. 부모님께 그만 물어보고, 본인의 앞날은 스스로 정해야죠. 이건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 드리는 거예요.”
그들은 다단계로 성공한 20대 초반의 부자들을 내세워서 질투심을 유발하고, 20대 후반이 되도록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부모님과의 소통을 차단합니다. 인생의 풍파를 겪은 부모님과 상의하는 순간, 다단계가 사기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영혼을 구속하고 고립시키려 합니다. 이것은 가스라이팅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시가 있어 요약해 봅니다.
“일찍 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그렇다면 벌레의 입장에서는 늦잠을 자는 것이 유리하다.”
임제 스님의 말씀대로 권위 있는 가르침에 무작정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현실감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 “매너는 사회적 무기”
유튜버 대도서관님과 윰댕님이 풋풋한 연인이던 시절, 한 시청자 사연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20대 남자 신입사원입니다. 성격이 좋아 회사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문제는 짝사랑하는 여직원이 있는데, 제가 다른 여직원들과도 너무 친하게 지내니 가벼운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다른 분들에게는 무뚝뚝하게 굴고 그녀에게만 잘해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도서관님이 답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매너는 아주 좋은 무기입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계속 그렇게 하세요.”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짝사랑녀에게 오해받기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모두에게 잘해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매너는 아주 좋은 습관이자 사회적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여성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짝사랑하는 여인과 사귀게 되었다고 해도, 사연자의 인생 전체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쁜 습관만 익히게 되는 것이죠.
드라마에서는 '차도남'이 지고지순한 사랑처럼 보이지만, 대도서관님은 내담자의 발전만을 생각하신 겁니다. 잘못된 태도로 인간관계가 고립되는 것보다는, 성격 좋은 직원으로 성장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 상담해 오면 "이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며 훈수를 두며 상대를 깔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스스로 경계해야 할 가스라이팅입니다.
네 번째,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내용입니다.
“장성한 자녀가 집에서 놉니다. 이 자녀를 위해서 내보내야 할지 고민입니다.”
스님이 대답합니다.
“20세가 넘으면 성인입니다. 부모는 성인이 된 자녀를 부양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쫓아도 됩니다. 다만, 내가 사랑을 한다면 계속 데리고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자가 반문합니다.
“그래도 주위에서 그 나이가 되도록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요...”
스님이 다시 답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쫓아도 되고, 사랑한다면 같이 있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의 나이가 아닙니다. 본인입니다. 본인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보세요. 남의 눈치 보지 마시고요.”
스님은 자녀 문제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사는 게 힘든 사연자에게만 집중하셨습니다. '당신은 자녀를 사랑해서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 내쫓으면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 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자녀를 위해 출가시켜라" 같은 면죄부를 받고 싶었겠지만, 스님은 본인의 마음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은 대답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어 주변의 체면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도 타인의 반응이라는 마약을 끊고, "나도 하니까 되더라"라는 건강한 우월감을 찾기 위해 나만의 루틴을 수행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내가 타인을 가스라이팅 하려는 마음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타인을 가두려는 욕망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