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훈육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부모는 ‘내가 아는 것이 옳다’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난해지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훈육의 내용보다 그 방법에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중구속’이었습니다.
이중구속이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틀렸다고 판정되는 훈육 구조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전봇대에 이마가 부딪칠 수 있다며 숨바꼭질 놀이를 금지하셨습니다. 어기면 손바닥을 맞아야 했죠. 자연스럽게 저는 친구들과 멀어졌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친구가 없는 저를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폭발한 제가 따지자 아버지가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네가 못나서 친구가 없는 거잖아. 왜 숨바꼭질 탓을 해?
친구들을 살살 꾀어서 다른 놀이를 하면 되잖아? 바보 같은 게.”
네, 사실 아버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과 멀어지는 데에는 내성적인 제 성격도 크게 한몫했습니다. 문제 이미 생긴 상처에 자꾸만 소금을 뿌린다는 점입니다.
초등학생 시절의 일입니다. 하교 시간에 천둥이 쳤고 창밖에는 억수같이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비 맞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집 밖으로 다시 쫓아내셨습니다.
“우산도 같이 쓸 친구가 없어? 이렇게 비가 오는 데 혼자 비를 맞고 와? 짜증나니까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
“...”
그나마 동네 동생들과는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또래는 못 사귀고 어린 애들이랑 논다며 아버지는 또다시 집요하게 면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작 한두 살 차이였는데도, 아버지는 못마땅해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저는 결국 그 동생들과도 멀어졌습니다.
이중구속은 친구 관계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돈을 쓰면 함부로 쓴다고 맞았고, 공책을 아끼려고 글씨를 작게 쓰면 사내답지 못하다고 맞았습니다. 밖에서 다치고 돌아오면 ‘아버지 속이 상했다’는 이유로 맞았고, 집에만 있으면 사회성이 부족해진다며 맞았습니다.
숨을 쉬면 맞았고, 숨을 참아도 맞았습니다.
이 이중구속의 무서운 점은,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실패자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감옥에서 아이가 배우는 것은 ‘자신만의 노하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법’입니다.
실제로 저는 제 욕망을 좌절시키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했습니다.
추측해보건대, 아버지의 훈육목표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습니다. 가난하지만 골목대장처럼 친구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적재적소에 돈과 에너지를 쓸 줄 아는 지혜.
하지만 아버지는 생각보다 사회 경험이 적었고 TV로만 세상을 배우신 분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아버지에게는 친한 친구나 직장 동료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제 과거사를 길게 썼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이전에 소개해드린 신의 매커니즘을 통해 가볍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아동학대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가난한 형편 속에서 저를 최대한 귀하게 키우려 애쓰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아였습니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큰돈과 다리뼈 하나도 잃으셨죠.
밴댕이 같은 속으로 거친 파도를 이해하듯, 상처 많은 마음으로 저를 지금까지 키워준 고마운 분이십니다.
문제는 원망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제 마음에 심어 놓은 이 가난의 알고리즘은 삭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금융 공부는 부를 향한 열망이자, 동시에 마음을 치료하는 의술입니다.
아버지의 이중구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내다워야 해’ ‘리더십이 있어야 해’ ‘친구를 많이 사겨야 해’ ‘경험이 풍부해야 해’ 등 본인이 가지지 못한 ‘멋진 남자’에 대한 환상과 뿌리 깊은 콤플렉스가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용암처럼,
본인뿐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화상을 입히는 위험한 자의식입니다.
이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제가 찾은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별게 아니다
이 말은 저를 비천하게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부정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가짜 완벽함’과 ‘과잉된 자의식’에서 저를 해방시키는 말이었습니다.
“내 나이가 별게 아니다.” 그러니 어린 동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내 지식이 별게 아니다.” 그러니 아버지와의 말다툼에서 져도 자존심이 다치지 않습니다.
“내 상처가 별게 아니다.” 그러니 더 작은 상처에 갇혀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작품이 별게 아니다.” 그러니 출판사의 악평에도 창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존재가 별게 아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타인과 부딪쳐도 화낼 이유가 없습니다.
- 나는 별게 아니다. 그러니 나는 세상을 향해 닫혀 있을 필요가 없다. -
‘나는 별게 아니다’라는 인식은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혹은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나를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신의 매커니즘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유지족입니다.‘나는 오직 만족만을 안다’는 뜻의 불교 사자성어입니다.
법구경에서는 “족함을 아는 이는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다”고 했고,
중아함경에서는 “욕심을 줄이고 족함을 알면 비록 거친 옷과 음식을 먹어도 마음은 편안하다”고 말합니다.
이 매커니즘의 비결은 ‘감사’와 ‘기쁨’입니다.
첫 번째는 ‘감사’입니다.
정혁이라는 모델이 있습니다. 그는 기초생활 수급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참 고마운 나라다. 가난한 우리 가족의 생계를 무상으로 도와준다. 이 은혜를 꼭 갚고 싶다. 나도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그는 모델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고, 이제는 불우한 이웃을 도울 수 있을 만큼의 부를 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담이 아닙니다. 감사라는 신념이 인생의 출발선을 바꾼 사례입니다.
똑같이 기초생활수급 가정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세상이 나를 돕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에너지를 썼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세상은 나를 무시한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거대한 자의식을 키우는 데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같은 출발선이었지만, 한 사람은 스스로 삶을 귀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삶을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은 신념의 차이가 인생의 알고리즘을 갈라놓았습니다.
두 번째는 ‘기쁨’입니다.
오유지족의 핵심은 자기만족을 넘어,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저의 주식 선생님 역시, 이 능력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주식투자자는 세상이 발전한다는 긍정적인 믿음과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요동치는 시장에서 멘탈을 지켜줍니다.”
이 마음은 주식 시장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마음의 기술입니다.
저는 송하영이라는 여자 아이돌을 오유지족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만족은 ‘큰 성취’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맏언니로서 건배사를 제안 할 때도, 작은 게임에서 1등을 할 때도, 라면 하나를 다 먹었을 대에도 스스로를 엄청 뿌듯해 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그의 꿈입니다.
그는 붕어빵 장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결국 일일 체험까지 해냅니다.
“ 붕어빵을 사 먹었을 때 행복하잖아요. 그 기분을 나눔하고 싶었어요.”
붕어빵을 사면 누구나 행복할 것이라 믿는 자기중심성이 참 아름답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결국,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니까요.
붕어빵 한 봉지를 선물 받아도, 샤넬백을 받은 것처럼 크게 기뻐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고난은 많지 않습니다.
감사와 기쁨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의 구절처럼, 자족하기를 배우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맺히는 성과물입니다.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감사와 기쁨을 배운 사람은 가난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끝없이 탓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과 행동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구겨진 인생의 알고리즘은 다시 쓰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