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메커니즘 5부

가장 낮아짐으로써 가장 높아진 사랑

by 이영우

비에 젖은 길고양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지렁이는 자칫 모르고 밟았다가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렁이는 기껏해야 새의 먹이나 낚시터의 미끼로 이용 될 뿐, 그 존재 자체로는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렁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인간과 지구를 사랑합니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그들의 일상은 척박한 땅을 기름진 옥토로 일구어냅니다. 그 덕분에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며, 마침내 열매가 맺혀 수많은 생명을 배불립니다.


이 사랑에는 대가가 없습니다. 지렁이는 끔찍한 세월을 견딘 배추흰나비 애벌레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얻지도 못하고, 산천을 호령하는 맹수로 다시 태어나지도 못합니다. 그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징그러운 모습으로, 가장 고귀한 자비를 실천할 뿐입니다. 한 생을 사랑으로만 온전히 연소시킬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부처님과 예수님의 이타심은 바로 이 '지렁이의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어떠한 계산도 없는 순도 100%의 자비. 그렇기에 평범한 우리에게 이 같은 이타심을 강요하는 것은 정서적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덧셈 뺄셈도 힘겨운 아이에게 미적분을 풀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랑이라는 지혜를 실천하면 됩니다. 사랑받고 싶은 만큼

사랑하고, 이해받고 싶은 만큼 이해하면 됩니다. 그 사랑이 나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어낸 듯한 사랑도 존재합니다. 오늘은 강요가 아닌, 그저 참고할 만한 아름다운 ‘본보기’로서 그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입니다. 허름한 행색의 걸인이 분식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사장님은 익숙한 듯 그를 반기더니, 주문도 받지 않고 떡볶이 한 대접을 내왔습니다. 족히 3~4인분은 되어 보였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허겁지겁 그릇을 비웠습니다. 고마움도, 미안함도 보이지 않는 무정한 태도였습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사장님은 미리 포장해 둔 떡볶이 봉지를 건넸습니다. 남자는 낚아채듯 봉지를 받아들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원망 대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제작진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사장님은 그를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대신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들에게는 쉽게 머리를 조아리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를 낮추어서, 저분을 예수님처럼 긍휼히 섬겨 보자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떡볶이 국물이 묻은 앞치마를 두른 여사장님이 세상 그 누구보다 품격 있고 지적인 성인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왜 '고급스럽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을까요? 지금도 그 이유와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 수준을 뛰어넘는 영역입니다. 다만, '가장 낮아짐으로써 가장 높아진 사랑'이라는 전율만이 남았습니다.


정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장님은 떡볶이를 걸인에게 건네며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 다른 곳에서 사랑 받는다”고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건넸을 뿐입니다.


반대로 공감이 결여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언어로 훈계합니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빛나는 말들로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체포 당시 “여성들은 함부로 몸을 놀리지 말고, 부유층은 각성했으면 한다”는 식으로 살인을 훈계처럼 정당화했습니다. 히틀러 또한 ‘국가의 부흥’과 ‘민족의 구원’ 같은 언어로 대중을 선동했지요.

우리 주변에서 나를 비난하는 이들의 말도 뜯어보면 대부분 옳고 정의롭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뿜어내는 눈부신 궤변에 휘둘리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의 어두운 심연으로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극단들 사이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알코올 의존증이라면 10잔 마실 것을 9잔으로 줄이는 것. 9잔을 마셨다고 자책하기보다는, 1잔을 줄인 나에게 희망을 거는 것. 그리고 11잔을 마시던 이웃이 13잔으로 늘어났다면, 함께 반 잔을 줄이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제 지인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일입니다. 대낮에 술 취한 20대 여성이 소주를 사러 들어왔습니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내미는 손목에는 자해의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지인은 짐짓 모른 척, 그러나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어휴, 예쁜 아가씨가 몸에 난 상처를 그냥 두면 어떡해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제 손목에 난, 이 상처… 아물까요?”


지인은 말했습니다.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햇살 한 줌으로 시든 꽃을 단번에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0의 고통을 0으로 만들 수는 없어도, 9로 줄여 줄 수는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서로를 구원합니다. 거창한 명분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당신이 건넨 작은 눈빛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분명 신의 기적이 되었을 테니까요.




이로써 ‘신의 메커니즘’ 연작이 끝났습니다.

제가 감히 불교와 기독교를 넘나들며 이야기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신의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공짜로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기 위해 비싼 학원비를 내고, 경제의 흐름을 읽기 위해 유료 구독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유튜브를 켜고 ‘법문’ 혹은 ‘설교’라고 검색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혜를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절실하다면 도서관에서 종교 서적을 빌려보거나, 주말에 교회와 절을 찾아가도 됩니다. 가입비도, 구독료도 필요 없습니다.


종교는 제게, 개인의 자유와 구원의 근원이 결국 ‘사랑과 자비’라는 메커니즘 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꼭 필요한 한 문장, 한 구절, 한 깨달음이 그곳 어딘가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착하게 살기 위해서만 종교를 찾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삶이 무너져 내렸을 때, 분노와 미움이 나를 지배할 때,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견뎌 내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립니다.


AI가 시를 쓰고 드론이 전쟁을 수행하는 첨단의 시대라 해도, 인류가 흘리는 눈물의 성분은 태초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눈물을 어떻게 받아내고, 어떻게 지혜롭게 건너갈 것인가에 대한 인류의 고귀한 사투가 에센스처럼 응축되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종교입니다.


가난의 진짜 비극은 통장 잔고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결핍 때문에 삶의 기본기를 왜곡된 방식으로 익히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의 밥상에서 태어난 우리는, 더더욱 검증된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내 마음의 메커니즘이 고장 난 것 같다’고 느낀다면,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종교의 문을 두드려 보십시오.


그 문 안에는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가장 정교하고 따뜻한 신의 메커니즘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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