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못 타세요?”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다 대뜸 자전거 이야기가 나왔다.
중국의 흙먼지 속에서 보조바퀴를 달고 자전거를 타던 스무 살의 내가 갑자기 떠올랐다.
처음 상해에 도착해 내가 다니게 될 대학을 둘러보던 날 ‘여길 어떻게 다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는 대도시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캠퍼스가 상당히 넓은 편이었는데,
비교하자면 잠실 종합운동장의 다섯 배쯤 되는 규모였다.
기숙사에서 전공 수업 강의실까지 걸어서 20~30분, 거기서 교양 수업 건물까지 또 10분.
아, 중국이 괜히 자전거 강국이 아니구나…?
문제는 내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초중고 내내 체육 수업을 제일 싫어했고, 운동신경도 꽝.
특히 평균대에서는 한걸음도 못 딛는 나에게 자전거를 타기 위해선 너무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 큰 캠퍼스를 걸어 다닐 수는 없었고, 버스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은 같은 과 친구들의 자전거 뒤에 얻어 타기를 2주일.
애들이 착하고 같은 수업을 듣기 망정이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나를 태우고 다니기 버거웠을 친구들은
내 결정에 열렬히 환호했고 무조건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보조바퀴가 필요했다.
두 발자전거로는 단 1m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보조바퀴가 달린 성인용 자전거는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와 친구들은 돌고 돌아 어린이용 자전거가 있는 매장을 찾아갔다.
나의 목적은 진짜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겠다는 건 아니었다.
혹시 몰라 시도는 해봤는데 당연히 내가 타기엔 다리를 굴리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자전거 강국의 자전거 매장 사장님은 다 큰 어른이 왜 그걸 타보냐고 물었다.
이 나이 먹도록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 하셨을 것이다.
사장님께 물었다.
“성인용 자전거에 보조바퀴를 달아주실 수 있나요?”
사장님의 얼굴에 ‘엥?’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자전거를 못 탄다는 설명에 사장님은 황당해하며 그냥 타면 되는 거라고 했지만,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나도 그냥 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망치를 집어 들었다.
탕, 탕, 탕.
성인 자전거와는 높이가 전혀 맞지 않는 어린이용 보조바퀴를 억지로 펴서 끼워 맞추셨다.
세상에 하나뿐인 네발 자전거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공터로 향했다.
앞뒤양옆으로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한발 한발 페달을 돌렸다.
오, 움직이긴 한다!
하지만 한번 본래의 각도를 잃어버린 보조바퀴는 곧잘 휘어졌다.
직진할 때면 내 자전거의 네 발이 모두 땅에 닿아 있다.
하지만 내가 균형을 잃어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면, 그만큼 그쪽 보조바퀴는 바닥과 거리가 멀어졌다.
보조바퀴가 조금이라도 바닥에서 뜨면, 나는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브레이크를 잡으며 즉시 멈췄다.
내 호위무사들은 자전거 가게 사장님을 대신해 부서진 펜스 등으로 연결부위를 두드려 다시 각도를 맞춰주었다.
10분이면 가는 거리가 40분이 걸렸다.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이제 조금 큰길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사방으로 호위를 받으며 도전을 시도했다.
아차.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를 피하는 상황을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극도로 긴장한 나는 맞은편 사람에게 한국어로 연신 비키라고 외치기만 했다.
아무도 알아듣진 못했으나, 단단히 긴장한 내 얼굴과 달달거리는 보조바퀴를 보고 다들 황당해하며 알아서 피해 주었다.
그래도 하다 보니 조금씩 적응은 됐다.
비록 핸들이 부서질 듯 꽉 쥔 손에서 고작 엄지손가락 하나 들어 자전거 벨을 따릉-하고 울릴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비키라는 말은 중국어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적 여유가 생겼다.
책으로만 중국어를 배워 일상에서 쓰는 말은 전혀 몰랐던 나는 사전을 통해 “랑카이”라는 단어를 배워왔다.
그 단어는 사실 ‘비켜!’라는 강한 명령어였지만, 그 뉘앙스도 몰랐거니와 실제로 내가 강압적으로 비키라고 말할 상황이긴 했다.
나는 10도 이상 옆으로 고개도 돌릴 수 없어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다.
여전히 달달 소리를 내는 보조바퀴와 누가 봐도 외국인 티가 역력한 ‘랑카이’라는 외침에
마주치는 중국인들마다 웃었다.
그날 저녁 친구가 ‘랑이샤(잠시 지나갈게요)’라고 말하라고 알려줬다.
오케이, 접수.
예의 있게 비켜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지 며칠이 지났을까.
이제는 호위무사들이 펜스를 찾는 횟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슬슬 보조바퀴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는지, 보조바퀴가 조금 바닥에 닿지 않아도 어느 정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소음이 줄어드는 만큼 조금씩 재미가 붙었다.
속도를 올려 달리다 마음이 앞서 급하게 우회전을 해버렸다.
내 오른쪽 보조바퀴가 바닥에서 멀어지다 못해 하늘로 향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 오던 친구가 지금 괜찮다며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고 했다.
그래, 아직 한쪽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좌회전을 해야 한다.
좌회전을 하려면 100미터는 더 가야 했지만 벌써부터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게 마음의 안정을 주던 보조바퀴는 이제 하나 밖에 안 남았고,
곧 남은 하나도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될 것이다.
보조바퀴 없이 온전히 내 힘만으로 설 수 있을까? 이게 될까?
하지만 이미 멈출 수는 없었고, 마음 한 구석으로는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 있었다.
핸들을 조금 더 꽉 쥐었다.
50미터, 40미터, 30미터…
그리고 좌회전.
20살, 나는 자전거라는 평생 기술을 하나 습득했다.
나는 그 스킬을 조금씩 레벨업해나갔다.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지나가던 중국인과 부딪혀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들고 걸어가기도 힘든 사이즈의 장구를 메고 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생 커뮤니티에 “자전거 대륙횡단 팀원 모집”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상해부터 쿤밍까지 한 달 동안 약 3천 킬로미터를 자전거로 횡단하며 한국을 홍보하겠다고 했다.
사물놀이 동아리 회장이었던 내게도 함께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보조바퀴를 뗀 지 고작 3년, 꽤나 극단적으로 레벨을 뛰어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자전거로 대륙횡단”보다는 “사물놀이로 대륙횡단”에서 더 욕심이 났다.
3천 킬로미터니, 한 달이니 하는 숫자는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엉덩이를 잔뜩 치켜세우고 타는 MTB 자전거는 무척 생소했다.
내가 타던 자전거와 달리 안장도 높고, 바퀴도 좀 더 울퉁불퉁 파임이 많아 자전거보다는 자동차 바퀴 같았다.
자전거를 탄 상태에서 다리를 뻗어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몸을 기울여야지만 타고 내릴 수 있었는데,
극도로 균형에 민감한 나는 몸을 기울이면 넘어질 것 같아 그냥은 절대 바로 내리지 못했고,
늘 발받침할 만한 높이가 있는 보도블록을 찾아 몸의 기울기를 최대한 안전하게 한 상태에서만 내릴 수 있었다.
매일 100킬로씩 달려야 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여름 내내 훈련해야 했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이 워낙 스펙타클했던 덕분이었을까, 훈련은 생각보다 잘 따라갔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것만 빼면.
그러나 자전거 후원이 무산되어 프로젝트도 해산되어 버렸다.
“사물놀이로 대륙횡단”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무 아쉽고 슬펐다.
하지만, “자전거로 대륙횡단”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조금 다행스럽기도 했다.
몇 번 발받침 없이 MTB 자전거에서 내리는 것에 도전을 해보았지만,
매번 긴장해서 굳어진 몸으로 넘어져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3천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매번 보도블록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찌 됐든 나는 이미 상당한 레벨업을 한 상태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전거가 있어도 못 탔던 나인데,
이제는 자전거만 있으면 3천 킬로미터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 자신감을 갖게 된 것만 해도 나에겐 충분했다.
여전히 복잡한 도로나 울퉁불퉁한 길은 부담스럽다.
MTB 자전거를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냥 자전거도 한 손으로는 타지도 못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전거 못 타세요?”
“저 좀 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