吉野弘
분명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걷고 있을 때, 푸른 저녁 안갯속에서 떠오르듯이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른하고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워 보였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나는 그녀의 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를 아래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 신비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태인 의미를 불현듯 이해했다. 나는 흥분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역시 'I was born.'이네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되풀이해 말했다.
"'I was born.'이라는 것, 수동형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태어나지는 것이에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때 아버지는 어떤 놀라움을 느끼며 아들의 말을 들었을까. 아버지의 눈에는 나의 표정이 그저 순진하게만 비쳤을까. 그것을 짐작하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 어렸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발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루살이라는 벌레는 태어나서 이삼일 만에 죽는다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오는 것인가, 그런 것이 무척 궁금했던 적이 있었지."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느 날 이것이 하루살이 암컷이라며 확대경으로 보여 주었어. 설명에 의하면 입은 완전히 퇴화해서 먹이를 섭취하는 데 적합하지 않고, 위를 절개해 봐도 들어 있는 것은 공기뿐. 들여다보니 그 말 그대로였어. 그런데 알이 뱃속 가득 충만해 있어서 홀쭉한 가슴 부분까지 꽉 차 있었어. 그것은 마치 현기증 나도록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는 것처럼 보였어. 외로운 빛의 알들이었지. 내가 친구 쪽을 돌아보며 '알'이라고 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안타까운 일이군.'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네 엄마가 너를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그다음 말은 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통증처럼 아프게 내 뇌리에 꽂힌 것이 있었다.
홀쭉한 어머니의 가슴팍까지 숨 막히도록 가득 채우고 있던 나의 하얀 육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