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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Feb 21. 2020

외지인이 논산 찾아올 또하나의 이유, 김홍신문학관

- 김홍신문학관 상량식과 사랑채특강

코메디언은 집에서 어떻게 할까? 밖에서 무자게 웃기는 분위기 메이커가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그러나 싶어서 부인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답 = “집에 와서는 입을 자꾸로 봉하고서 살아요ㅠ” 


깜빵에 갔다온 사람이니 한번 더 가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이골이 나서, 별 대수가 아니겠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며 발버둥칠 정도라더군요. 목수가 집에 와서 못 하나 박는 법 없다는 말도 현실이고요... 


글쟁이도 그러는 걸까요? 기사를 써야만 돈이 나오는 직업이 신문기자일텐데, 선무당인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이 기사 써줄 사람 어디 없을까?” 그것부터 잔머리를 굴립니다. 아이들 입에 달린 말이 “용돈 주세요”이듯, 내 입에 달린 말은 “글 좀 써주세요.”


아래 두 글은, 그런 게으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둘 다에게서 OK 소리 얻어낸 다음 나는 “얏호!” 쾌재를 불렀드랬습니다. 앞 부분에 도입글만 쓰고, 메일 도착하면 큰 제목과 중간 제목 질러주고, 사진만 챙기면 거져 먹기니까! 그러나 정작 더 신나는 것은 “받은 글들의 꽉 찬 알맹이”.....  앞 글은 시민기자이니까 웬만큼 짐작이 되었지만, 뒤의 글 써주기로 한 분이 초면이었고 일행 중 최고령이었습니다. 내심 드는 걱정 “저분이 과연 내실 있는 글 써주실까?” 싶었는데.. 와, 막상 받고 보니까 #대박~대박~  무림중원에서 고수는 도처에, 일산(한뫼)에^^^




[김홍신문학관 상량식과 사랑채특강]


외지인이 논산 찾아올 또하나의 이유, 

김홍신문학관



수원의 고은문학관, 화천의 이외수문학관 등 지방자치단체가 유치한 대작가 전용 문학관이 진통을 겪었다. 작년부터 논산에 둥지를 틀게 된 김홍신 문학관은 국민 세금으로 짓는 게 아니다. 민(民) 주도로, 홍상문화재단이 모금도 하면서 계속 건축중이다. 두 동 중에서 한 동은 대외용인데, 일전 그곳에서 상량식이 있었다. 그날, 대내용인 집필관에서 최초로 단체 숙박 손님을 받았다. 외지인들은 논산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막상 둘러보니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건양대 운동장 옆에 터를 잡은 김홍신 문학관은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동은 집필관이고, 작가 자신과 문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이다. 건축학적으로도 신기원을 이룰 이  건물은 이미 완공 상태이다. 또다른 한 동이 큰 길쪽을 향하고 있으며 한창 공사중이다. 논산시민과 타지 김홍신 팬들이 문학의 향기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17일(토) 오후 4시 김홍신 문학관 앞동의 상량식이 있었다. 천지신명과 성주님께 상량의 기쁨을 고하고자 한다는 축문에 맞춰 상량식이 시작되었다. 상량식 글씨는 노정 윤두식 선생이 썼다. 김홍신 작가를 비롯하여 송영무 전국방장관과 김형도 도의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 12월 준공을 목표로, 남은 공사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비나리를 쳤다. 차례로 잔을 올리며 상량식이 끝난 후에 일산에서 임대 버스로 방문한 인문학 동아리 ‘오감’ 회원들을 대상으로 준공된 집필관 건물 투어가 시작되었다.


휴대폰 안 터진다는 3단 집필관


건물안내는 건축가 남상원 회장이 맡았다. 이 문학관 태동을 위해 건축자금 40억을 투자함은 물론, 건축가로서 친환경 건축의 전형(典型)을 제시하고자 직접 설계하고 감리한 회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맞아주는 건물의 첫 단을 오르면 양옆에 집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한옥에 있는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집필실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단을 더 오르면 만 권을 저장할 수 있는 서고가 오른편에 있고 자연스럽게 건물을 따라 흐르는 물길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앞을 막는 것이 있으면 돌아갈 줄도 아는 물은 평화의 상징으로 예부터 선비들이 사랑하는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단을 오르면 김홍신 작가 개인 집필실이 있다. 작가의 사적인 공간을 돌아볼 흔치 않은 기회에 들뜬 동아리 회원들은 은밀한 엿보기를 마치고 김홍신 작가의 강의를 듣기 위해 2층으로 이동했다. 



김홍신 문학관을 세운 <홍상문화재단>은 "김홍신 + 남상원(왼쪽)"에서 한 글자씩 



명답 가지고 살자는 김홍신표 특강


2층 사랑방으로 모이니 40여 명이었다. 논산의 돈암서원과 명재고택 등을 안내해온 남상원 회장의 사회로 30여 분의 특강이 진행되었다. 특강 후에는 선물 교환식이 이어졌다. 국보급 서예가인 노정(魯亭)은 고양시 일산에서 논산을 찾은 일행들에게 일필휘지 ‘오감’ 이름을 써주면서 논산의 예(禮)를 소개했다. 나무공방도 겸하는 오감에서는 각인한 목공예품들로,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김홍신 작가에게는 자그만 나무펜을 증정하였다. 김홍신 작가는 단신(短身)이지만, 그의 특강은 잠언(箴言)처럼 정곡을 찔러왔다. 


“제비가 텃새인 미국에서는 도시 개발로 인해 사고로 죽는 확률이 높아지자 제비 스스로 날개의 길이를 줄이도록 진화해 생존율을 높였다. 민들레도 도시 개발로 인해 멀리 날아가도 뿌리내릴 공간이 없어지자 씨를 무겁게 만들어서 시멘트 틈새에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진화하였다. 인간이 진화가 가장 늦다. 하지만 인간도 이제 나를 행복하게 만들도록 진화해야 한다.”

 “행복은 스쳐가는 것이라서 저축이 불가능하다. 그때 그때 행복을 누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니 명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인생의 명답은 한 번 밖에 못사는 것이고 이것이 마지막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심, 걱정, 짜증 분노와 같은 것들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 스스로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는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장간에서 불 달군 쇠 두들길 때 받침 쇳덩이인 '모루' 는김홍신 작가의 호이다. 


문지방 낮은동네 책방처럼

 

 김홍신 작가와 한 방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듯이 강의를 듣는 동아리 회원들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근거리에서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소망하는 일일 것이다. 김홍신 문학관이 건립된다고 했을 때 지역민들이 거는 기대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문학관은 대부분 지자체가 주도했고, 그래서일까 선입관인지 몰라도 문턱이 높아 보였다. 최초의 민(民) 주도인 김홍신 문학관의 경우는 어떠할까? 문학관의 상량식 행사를 지켜보면서, 머잖을 북카페 오픈 날을 기다리면서 김홍신 문학관이 지역민들을 위한 담장 낮은 사랑방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글] 홍미경 시민기자

[사진] 이지녕

위 글은  『놀뫼신문』  2018-11-20일자 7면에 실렸습니다. 

[김홍신문학관 상량식과 사랑채특강]

외지인이 논산 찾아올 또하나의 이유

https://nmn.ff.or.kr/17/?idx=1387718&bmode=view



[고양시 오감나드리의 논산 체감]


김홍신문학관에서 일박 테이프 끊은 날


오감나드리 모임 여행에 따라나섰다. 경기도 고양시에 몇몇 지인들의 모임으로 인문학기행을 10년 이상 연중 3회 정도로 이어져 왔는데 필자도 올해부터 함께했다. 올 초중반에 안동과 강릉지역을 방문 퇴계와 이이라는 두 거유를 만났었는데 이번에는 논산이란다. 대한민국 육군이라면 반 정도가 신병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훈련소가 있고, 딸기가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던 터에 올해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어 논산을 택했을까? 


오감이라 해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역사적 유적과 그에 스민 인물을 만끽했으리라. 뿐만 아니라, 현재 활동하고 있는 현지 예인들을 만나 마음의 힐링과 다짐을 해오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특히 이번 여행은 퇴율 성리학에 이은 조선중기 성리학과 예학을 엿보고, 일행이 관여한 김홍신 문학관 상량식에 참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더욱 설레었다.


사계선생과 고양시의 인연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받아드린 성리학이 임진년 정유년 양난을 거치면서 그 이념이 흔들이고 있었다. 그때 그 가치와 질서를 붙들어 매려고 몸부림쳤던 사대부의 중심에 연산으로 낙향해 예학을 집대성한 사계선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드님 신독재와 그 후학들이 배향된 돈암서원! 여느 서원과는 다르게 나즈막한 자리에 보물로 지정된 참 잘생긴 응도당을 비롯한 공부가 저절로 잘 되었을 법한 사학의 전당이다. 사계선생은 고양시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음을 알았다. 


기호학파 이이의 학문을 사사하고 이어받았다 하지만, 예학에서는 구봉 송익필의 예학을 전수했다고 한다. 구봉은 말년에 지금의 고양시 구산동에 구봉산방이라는 학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하니 당연히 사계선생도 고양땅을 방문했으리라. 여느 서원과는 달리 장판각에 꽉 차게 보관된 목판에 색인 붙여진 상례비요, 가례집람이 눈길을 잡는다. 가가호마다 예법이 달라 서로 달라 논쟁이 붙으면 이 책자를 들고 나오면 상황 끝이었다는 예학의 종결자! 그 인쇄판각을 만나는 행운을 안겨주었다. 


예송으로 대표되듯이, 중기조선은 당파의 정쟁이 극심했다. 서인 사대부의 영수들이 줄줄이 이곳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사변을 겪었단 말인가? 그 이면을 알고 보니 500년 이상을 세계 단일 최장수 왕조를 끌고 온 저력이 그곳에 스며 있었다. 지금의 양당정치 강온파(진보와 보수)의 대립과 타협이라는 민주정치의 마당이 중세 조선에 이미 있었던 것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국보급 서예가인 노정(魯亭)이 논산을 찾은 손님들에게  ‘오감’  써주면서 논산의 예(禮)를 소개


파평윤씨가 왜 노성윤씨?

다음 행선지 명재 윤증 고택. 이곳은 직계는 아니지만 필자하고는 같은 일가의 사저다. 관향을 물었을 때 ‘노성 윤씨’라고 답하는 분을 만나면 오만하다고 느꼈던 그 노성파 윤가들이 자랑하는 곳이다. “왜 그들은 파평 윤가이면서 노성을 강조했을까?” 하는 의문은 종학당을 방문하면서 이해가 되었다. 문중의 자제뿐만 아니라 타문중의 자제도 입학이 가능했고, 그 출신 과거 합격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후예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만했겠구나 생각해 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자리 잡은 지역 최고 사대부의 집! 전직 역사 교사이던 문화해설사의 디테일한 설명이 그에 생명을 불러 넣어주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스스로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은 자신만의 느낌을 전해주시는 그분만의 미학에 감탄했다. 동편 좌청룡 부분의 낮은 곳을 비보하여 심어진 느티나무 평상에서 바라본 고택의 모습은 가히 한편의 예술이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모루 김홍신 기념관에서 함께 유숙


유적과 과거의 명성 난 인물만인가? 그곳에 그만한 사람이 있어 그 이름값은 한다지요ㅎ~ 때마침 모루 김홍신문학관 상량식이라 한다. 또 지역출신 문인 끌어들여서 지자체 홍보와 관광 상품화의 저의가 있겠지 했다. 막상 식장에 도착하니 한옥 건축물이나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려니 했던 예상이 모두 깨졌다. 택지개발지내의 현대식 건축물이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또는 특혜성 시비로 문학관 존폐 위기에 몰린 화천과 수원의 이름난 문인의 문학관과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자체의 공적자금이 지원되지 않은 독지가의 재단출연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특혜 시비가 없는 개발지구내 자리 잡은 것이다. 


건축설계 역시 실용적으로 했지만 설계자의 말처럼 명재 고택의 한옥배치의 다양성과 조화를 원용(援用)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준공한 모루 선생의 집필실에서 하룻밤을 유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함도 컸지만, 우리 오감나드리 일행이 온 방들을 최초로 꽉꽉 채워 야단법석하게 지기를 불어넣어 ‘큰 부조했다’고 자만해 본다. 


이른 아침 문학관 뒤편 야산을 통해 관촉사에 이르는 산책을 하였는데, 고즈넉한  오솔길이 참 정겹다. 죽은 자의 음택이 유난히 많았다. 편안하게 보여 참 고이 잠들어 있구나 생각했다. 이런 곳을 명당이라 했나보다. 앞이 탁 트이지 않고 낮은 구릉이 감싸고 도는 그런 무덤군이다. 집필실을 문인들 누구에게나 개방한다고 하니, 이곳에 머물고 산책하면서 작품 활동하는 분은 모두 모루선생처럼 밀리언 셀러 작가로 대성하기를....


논산, 군인의 산실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논산! 탑정호 제방뚝에 오르다 만난 감처럼 다정하고 넉넉하고 여유롭다. 이미 수확을 했을 시기가 지났을 법한데 아직 그냥 매달고 농익고 있다. 그냥 까치밥으로 몇 개 남겨 논 정도가 아니다. 나그네가 몰래 따서 한입 물어도 빙그레 백제의 미소처럼 웃어줄 다정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란 느낌이다. 모루선생의 다감하게 감싸주며 하시던 말씀, “과거의 영광은 금방 지나가더라. 현재를 즐기며 노는 행복감”에 푹 빠졌던 1박2일의 논산기행!


[글 ] 윤주한(통일을이루는사람들 이사장)

[사진 ] 행복한 라떼(미니안스튜디오)

위 글은  『놀뫼신문』  2018-11-20일자 7면에 실렸습니다. 

[고양시 오감나드리의 논산 체감] 김홍신문학관에서 일박 테이프 끊은 날 

https://nmn.ff.or.kr/17/?idx=1387723&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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