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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Jun 16. 2022

눈다리이야기와 눈다리식당 노부부의 백년해로

[동네방네] 논산시 광석면 신당3리(눈다리+덕포마을)

사오십년 전, 광석면 일대에서 오일장이 선 곳은 신당리의 ‘눈다리’다. 그 다음날은 논산(노성)과 공주(탄천) 접경지인 장마루장이다. 도로명으로 따져볼 때 장마루로는 참 길다. 이에 비하여 광석로는 극히 일부 구간이다. 광석면사무소 기준, 오른쪽 북향은 장마루로요, 서쪽 북향은 광석로이다. 



통행량이 많지 않은 광석로의 북쪽 끄트머리가 눈다리다. 눈다리 앞의 개천인 덕포천을 건너면 오강리다. 오강리는 동네 이쪽저쪽으로 다섯 개의 강이 구비쳐서 5강이다. 노강서원이 있고 지와바리전수관과 향토박물관이 있지만 덜 알려진 동네다. 



눕혀진 돌다리눈다리설교(雪橋)


5강 중에서 동편으로는 2강이 있다. 맨 동쪽은 광석면 사월리에서 발원하는 사월천이다. 두 번째는 덕포천이다. 이 두 강(개울)의 합수지점이 바로 눈다리다. 이 동네에서 북쪽으로 직진 오강리, 장마루, 부여 초촌 등지로 연결이 된다. 한때 교통의 요충지요 눈다리오일장이 섰던 곳였지만, 지금은 아주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동네 앞 덕포천에는 다리 두 개가 나란하다. 오른쪽은 구다리로 명맥만 유지하고, 왼편 신다리로만 교통한다. 


지금 다리 이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6·25때 미군 공습으로 나무교각이 부러졌다. “동네 아줌마가 그 나무다리 밑에서 빨래를 했어요. 고공에서도 나무다리를 정확히 맞추었지만 아줌마는 다치지 않았어. 대신 그 포탄 깎대기가 우리집옆, 저기 수리조합 자리에 떨어졌지. 그 탄피가 길었고, 동네에서는 그 쇳덩어리를 징으로 사용했어요. 동네에 일 있을 때는 그걸 막 쳤지.” 눈다리 토박이 하재억 어르신(85세)의 증언이다. “그때는 모래가 새하얗고 물이 맑았어요. 그러니 거기서 빨래도 하고 김장도 하고 다 했지.” 부부인 홍진희 여사(83세)가 거든다. 지명유래집에 보면, 사월천 발원지인 사월리는 모래 사(沙)를 쓴다. 


나무다리 이전에는 돌다리였다. 현재 눈다리 옆에는 신당3리 마을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눈다리는 옛날에는 긴 돌을 눕혀서 다리를 놓아 <누운다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돌다리> 또는 <설교(雪橋)>라고 하며....” 이렇게 써있는 안내글은 오류라고 하재억 씨는 지적한다. 근거가 있다. “처음에는 침대만한 크기의 돌로 세 개를 세웠지. 선돌처럼 입석으로 세웠어. 그런데 어느 해 장마가 심해서 그 돌들이 몽땅 눕혀진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눕혀 놓은 게 아니라 센 물살 못 이기자 선돌 스스로가 자빠진 거지.” 이 사실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자신밖에 모를 거라면서 돌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무다리가 놓이니까 그 아래 돌들이 소용 없어졌잖아? 근데 두 개는 누가 가져가버렸고, 나도 하나 가져왔어. 어머니 산소에다가 갖다 놨지. 해방 전 얘긴데, 그거 옮기느라 돈도 꽤 들었고.....” 

수원백씨4대효자정려 내부에는 기록이 즐비하다(좌=성균관장의 포창장).


주목받지 못해온 수원백씨 정려


눈다리의 길지 않은 상가거리에는 이발소가 둘이나 된다. 한 건물은 부부가 운영하는 경배이용원(신진미용실), 다른 곳은 설교이용원이다. <설교>라는 간판을 주마간산하면 ‘예배당 설교인가?’도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폐업상태지만, 바로 그 옆 <눈다리수퍼>를 보면 윤곽이 잡힌다. “아, 눈다리가 한문으로 표기하니 눈雪자 설교(雪橋)인가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는 한글을 한문으로 바꾸면서 임의로 추정한 곳이 비단 여기뿐이랴? 어찌 되었든, 언어는 각자 생명력이 있어서 이곳 지명은 눈다리도 되고, 돌다리와 설교도 된다.  

누운 다리 '눈다리'를  눈雪다리로 풀이한 설교(雪橋)


<신당3리는 눈다리와 덕포마을로, 북쪽 들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옆에는 석성천이 흐르고, 냇가 갯벌이 비옥한 전답이 되어 ‘사람에게 덕을 주었다’해서 덕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리 ‘대당’의 북쪽 들 가운데 있는 곳이 덕포(德浦)다. 신당리와 오강리 경계 뚝방길에는 덕포천이라는 안내판이 큼지막하다. 이 덕포마을 초입에는 수원백씨 4대 효자 정려가 서 있다. 


정려 한가운데 우뚝한 비는 효자수원백공학기기적비(孝子水原白公鶴基紀績碑)이고 천장 사방으로 둘러서 포창장(褒彰狀) 등 고문서 기록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논산의 전통문화 정보가 총집결돼 있는 ‘디지털논산문화대전’에는 광석의 신당3리, 눈다리, 수원백씨가 나오긴 나오는데, 해설 한 줄 없이 각자 단어 하나씩으로만 검색된다.


광석양조장 자리에 들어섰던 눈다리식당은 현재 '보리식당'으로 바뀌었다. 


광석양조장→ 눈다리 식당과 다방
 

정려를 뒤로하고서 번화가인 눈다리 거리로 되짚어오면, 눈다리다방과 보리식당이 나란하다. 광석양조장 있던 자리이다. 광석양조장은 내부에 맑은 샘물이 있었고, 한때 맛좋은 약주로 소문나서 서울까지 팔려나가던 명품막걸리였다. 6·25 이후에도 잘 나갔는데 40~50년 전 눈다리오일장 폐장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문을 닫았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이 눈다리 식당과 다방이었다. 눈다리식당을 10여 년 전까지도 운영하던 식당아줌마가 홍진희 여사다. 남편이 세 번 사기를 당하여서,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날려버리자 다섯 아이의 엄마인 홍진희 씨는 남의 집 오두막 처마 밑에서 빵장사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식당문을 열면서 백반은 물론 불고기 등등 푸짐한 먹거리를 내놓자 인근 각처 손님이 몰려들었다. 특히 모내기 철에 점심밥은 물론 일 끝난 저녁때도 집에 안 가고 이곳으로 모여서 영농회의를 하는 동네사랑방이 되었다. “내일 장사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들 가봐유~” 해봤자 우이독경이다. “아줌마, 문은 우리가 닫고 갈 거니 들어가 주무셔요.” 이 정도는 약과다. 모내기때 먹은 밥값은 베 비고 바심을 해도 감감무소식이다. 


밥장사를 43년 했고 그만둔 지 10여년 넘었건만 여전히 외상인 사람이 있다. “아줌니, 건강하세요!” 반세기 외상값을 갈음하는 덕담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그 양반들 덕에 우리가 살았고 새끼들 다 키웠지.” 고마워라 한다면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제일 대간하냐?’고 물어보란다. “벌어서 먹고 살면서 애들 가르치고 먹고 살기가, 그 일이 제일 어려워. 빚 안 지려고 하면서 말여유~” 외상을 많이 주는 장사를 했지만 그래도 빚 없이 애들 오남매 모두다 고등학교까지는 가르칠 수 있었단다. 성장한 자식들이 일산 파주쪽에서 미용실, 간판공장 등을 하며 다들 60평 아파트에 산다며 뿌듯해하는 노부부!


두 부부는 식당과 다방을 팔고서 바로 그 옆 작은집에서 단촐하게 산다. 오남매가 생활했던 별채다. 당시 다방 손님도 바글바글했다는데, 지금은 여느 시골다방처럼 한유롭다. 아니, 여태껏 다방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눈다리에서 면사무소쪽으로 가다 보면 농협이 나온다. 한때 노래자랑 같은 걸 하던 공유공간 농협창고에서 똥개말랭이로 조금 더 올라가면 우체국 옆으로 현대식 카페 ‘라온’이 나온다. 어감은 영어인데 ‘즐거운’이라는 우리말이란다. 인근 노성면, 상월면에도 모던한 카페 열풍이다. 이런 트렌드 속에서 눈다리 시골다방은 ‘계란동동 쌍화차’ 향수 불러일으키기 딱일 성싶다. 



부부 이발소/미장원 외에도 안쪽으로 이발소가 또하나 있다


새벽 4시에 거행한 혼례


가게가 몇 안 되는 동네에 떡방아간, 정미소, 옻닭집, 모터집은 물론 벼락대신 등의 간판이 과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눈마루 초입의 ‘광석루’는 숨겨진 맛집이다. 감칠 맛이기도 하지만, 영업집 분위기라기보다 마실 온 이웃집 느낌이랄까....


숨겨진 맛집 '광석루'에서는 광석면 단체회식처로도 유명하다


짜장면 한 그릇 후루룩 먹은 후 동네로 다시 들어가 카메라로 여기저기 담으니 동네사람들이 눈에 띈다. 인사를 드리니 한분은 6·25때 살기 어려워 피난민 따라 춘천으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기반 닦은 다음, 제사때마다 내려오는 귀향인이었다. 한분은 예전 눈다리식당 주인 하재억 어르신이다. ‘다방에 들어가서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십사’ 청하니, 집이 편하단다. 홍진희 여사도 함께 한 자리에서 옛날 이야기꽃이 펼쳐졌다. 이얘기 저얘기 끝에 두 부부가 곱게 나이 드신 거 같아 젊은 시절의 결혼사진을 청하니 없단다. “아니, 그 당시에 부자로 사셨다면서요?” 사연이 있었다. 신부감은 예산에서 살다가 19살에 눈다리로 이사온 처녀였다. 시어머니감은 이사온 처자를 눈여겨 보았다. 두 청춘남녀도 눈이 맞아서 중매라기보다 연애형식으로 사랑을 시작했고, 드디어 식을 올릴 때가 되었다. 


음력으로 설날을 코앞에 둔 12월 25일로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혼례 시간이 새벽 4시!  그 시(時) 맞추어서 올려야 백년해로한다고 해서 결혼식을 꼭두새벽에 올리게 됐다.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들은 밤새 놀거나 이바구 나누면서 기다렸고, 4시가 되자 예정대로 혼례를 올렸다. 한참 새벽인데다가 눈도 오는 날씨여서 사진기사를 출장오라 할 수는 없었다. ‘낮에라도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러면 결혼을 두 번 하게 되는 거니 안 된다”는 반대에 부딪혀 결혼식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눈다리식당을 43년 운영해온 눈다리 지킴이 하재억, 홍진희 부부


부창부수하니 무병장수백년해로


눈다리의 진주 하씨는 5대독자 집이었다. 딸만 연속 낳으니 남편이 속을 썩여도, 시어머니가 뭐라 해도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 드디어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시어머니가 풍이 와가지고 돌아가시기 직전, 며느리 만삭 배를 만지면서 하는 말, “이번에는 아들 낳아야 할텐데...” 죽기 전 시어머니가 소원하고 발복한 대로 한달 후 득남을 하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나이 50이 되었고, 손자를 하나 낳아 7대 독자를 이어간단다. “아들 딸이 용돈을 똑같이 주는데, 같은 액수라도 아들이 주는 돈은 달라요.” 남아선호사상은 오히려 여자쪽에서 더 강한 곳이 대한민국 현주소다. 


남편 하재억 씨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호강만 하면서 자랐다. 어느날 돈을 두둑하게 챙겨서 가출을 했다. 대전역 내리니 택시가 두 대만 있던 시절이다. 여자를 태우고 다니며 원 없이 돈을 썼던 시절도 있었지만 6·25 종전 후 3년 되던 해 군대를 갔다오고, 결혼 후 사기도 몇 번 당해 돈이 떨어진 다음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가정을 일으켰다. 식당일을 같이 하면서도 자기 관리는 꾸준하게 해왔다. 올해 85세 고령임에도 논산으로 헬스장을 다니는 그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한편 홍진희 여사의 총기는 장사를 오래 해서인지,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데서 빛난다. 그러고 보면 ‘혼례를 새벽에 올려야 백년해로 한다’는 말이 참말이었나 보다. 



[눈다리 가는 길] = 장마루로는 논산 대교동 새다리를 건너자마자 시작되어서 광석면사무소 우측을 경유, 공주역 거의 다갈 때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광석면사무소를 기준점으로 해서 북쪽을 볼 때, 오른쪽 큰길은 장마루로요 왼쪽 작은 길은 광석로이다. 


광석로는 광석중학교 앞에 있는 ‘이사삼거리’에서 시작하여 면사무소, 농협을 거친 다음 눈다리까지다. 정확히는 사월리에서 흘러나오는 사월천교가 덕포천과 합류되기 직전인 ‘눈다리 교차로’까지다. 그러니까 광석로는 이사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잠시 빠졌다가 사월천교로 다시 합류하는 흐름이요 모양새다. 광석로는 한적하지만 파출소, 보건소, 우체국, 노인회, 농협, 주유소, 정미소 등 주요시설이 좌우로 포진돼 있다. 이 광석로 끄트머리가 덕포천을 끼고 있는 눈다리요, 덕포마을이다. 


덕포마을 안에 있는 정미소(좌)와, 사월천과 합수한 덕포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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