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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Apr 29. 2019

“교촌치킨 물렀거라, 교동마님 행차시다”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논산시 은진면 교촌리

논산군이 생기기 전 3개의 현이 있었다. 은진현, 연산현, 노성현. 

이 세 현(지금의 군 단위)에는 각각 향교가 있다. 노성면소재지의 행정구역명은 교촌리이다. 향교가 있는 촌이 교촌!  어디 논산뿐겠으랴, 전국에 있는 향교가 234개이니.... 교촌리,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 교촌리라는 동네수는 그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은진면의 교촌리 기사를 내보낸 다음 접한 반응 중 하나:  “아니, 신문에 이렇게 써도 되나 싶었어요~”  신문은 주로 공식적이고 정확 딱딱한 팩트를 기록해가는 걸로 아는데, 의외라는 듯싶었다. 어쨌거나....ㅎㅎㅎ



은진은 은둔지 같다. 노출이 잘 안 돼 있는 편이다. 면사무소도 쑥 들어가 있고, 은진현 관아였던 은진초등학교도 쉬 눈에 띄지 않는다. 은진향교 자리도 큰길 옆에가 아니고, 교촌리마을회관 역시 안동네이다. 교촌리는 향교가 있는 동네라서 향교동이라 하는데, 충청도 발음상 ‘생계골’이라고도 부른다. 지역에 따라 교동, 교리로도 불린다. 전국적으로는 교동마님, 교촌치킨 등이 유명세지만 강릉의 교동짬뽕도 전국세이다. 향교는 전국 234개 있으며, 그 중 하나인 은진향교는 638년 전인 고려 우왕때 세워진, 연륜에 비추어서도 상위 랭킹인 국공립학교이다. 



1914년 일제때 3개의 현이 모아져 논산군로 군집되었다. 은진현, 노성현, 연산현이었고, 향교 각1교였다. 향교의 교장선생님인 전교가 가야곡분인지라 왜 은진분이 아닌지 의아했다. 돌아온 답은, 당시 은진현은 은진뿐 아니라 가야곡, 연무, 채운, 논산, 강경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인 강경장은 은진현감의 관할지였던 것이다. 


숨겨져 있는 마을들


은진면사무소 앞에는 비석이 즐비하다. 예전에는 농협에서 논산쪽으로 있던 비석거리가 현재는 면사무소 앞으로 이동해 있다. 면사무소에서 농협쪽으로 나오면 은진초등학교이다. 은진현 원님이 사시던 관아터이다. 이들은 가끔 서울로 출장을 간다. 가마를 타고 우회전하여 교촌리를 거쳐 성덕뜰 쪽으로 하여 북진한다. 향교를 지나치자 마자  망북동 날맹이다. 한양 북쪽을 내려다 보며 망보기 좋은 고지대 이곳에 장신 거목 팽나무가 하나 서 있다. 성황당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도 매년 정월대보름날 하루 전에 성황제를 지낸다. 성황제 외에도 산신제, 거리제도 지냈다고 한다. 거리제는 개인적으로도 하는데, 이 길 오가는 사람의 무사귀환까지 빌어주었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 오지랖도 넓다.


똑같이 한양 올라가는 길인데도, 삼남길과 교차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큰 길에서 90도 좌회전하면 은진향교 홍살문에  ‘삼남길’이라는 표식물이 붙어 있다. 이도령을 위시하여 남도 유생들이 과거보러 한양 올라가는 길이었단다. 우측 은진향교를 거쳐서 공주쪽으로 가는 게 과거 운이 있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은진향교를 통과하여 논산쪽으로 뻗은, 꼭 막혀 있을 거 같은 농로가 있다. 


꽤나 고즈넉한 산길 다 빠져나가면 건양대 원룸촌이고, 무시무시 변전소가 나온다. 교촌3리이다. 인공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이라서 난민촌으로도 불린다. 건양대학교가 들어오면서 논산읍 내동으로 베어주고, 그 자리에 원룸촌이 몰려오면서, 현재 교촌3리는 가구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시청이 들어오면서 주변이 확 변하듯, 대학교 캠퍼스가 하나 들어서니 논산과 인접한 은진면의 지형지세까지 천지개벽 수위였던 것이다. 



교촌대표 감, 복숭아, 대나무


그럼에도 교촌1리는 요지부동 은둔의 땅이다. 향교동 대표나무가 거목인 향교 은행나무, 성황당과 은진초 팽나무, 우람한 소나무 들일 거 같지만, 서민 입장에서는 따로 있다. 곶감하면 양촌 운주이다. 복숭아 하면 조치원 장호원이다. 대나무하면 담양, 지금은 중국산.... 김창중 교촌1리 이장은 어렸을 적 복사꽃으로 뒤덮인 마을, 복숭아꽃 살구꽃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단다. 땅 좀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복숭아밭은 동네아이들의 서리터였다고 기억한다. 까치밥보다 사람밥이 우선이었던 시절,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동네아이들의 허한 배는 치외법권 해방구가 필요했으리라. 


그러나 맛이 약간 신 이 복숭아 조생종은 다육질인 타품종과 외국 과일 쓰나미에 밀려..... 그 과수원 자리들은 다른 작물들에게 밀리고 만다. 그래도 새터로 들어서니, 신품종 복숭아 과수가 아직은 어리지만 가뭄을 견디고 있다. 작지만 그래도 은진복숭아의 명맥을 이어갈 거 같다. 


다시 길로 나와 보니, 훤출한 2층 작업장이다. 곶감 건조장이란다. 백정일 노인회장은 “복숭아/감 판매” 써 있는 명함을 건네준다. 여간해서 내주지 않는다면서, 동네 이장이 처음 본다 반응해도 한 장 더 빼내지 않는다. 큰길가 감나무 밭 밑에는 민들레 캐가지 말라는 경고문도 있었다. 몰랐는데, 이제는 캐가고 싶도록^^ “야생화” 간판도 눈에 띈다. 나름 이색적인 아이템을 선정하여 시도해 보았지만 재미는 못 보는 현실 같다. 새로 들어선 주차장 널럴한 웨딩홀, 일식집, 동네한복판으로 들어서 있는 대형유치원.... 저출산 영향인지 빈 자리가 많은 모양이다. 


감나무는 여전히 푸르르다. 천지사방 감나무다. 감나무는 은진이 양촌보다 많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들어가니 공주밤막걸리라면서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밤만 따지면 공주보다 부여가 강세인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브랜드만 주시하는 추세다. “은진 감”이 언제 치고 올라서려나?  가을에는 감 따러오라니까 그때 감식초를 비롯하여 은진 감을 정밀 감식해야 할 거 같다^^


대나무가 쑥쑥 자라는 걸 보면 교촌리는 온난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한때 교촌리는 죽공예  공동작업도 했던 모양이다.  '6시 잘살아보세' 프로가 있었다. 교촌리 주민들이 함께 모여 죽공예하는 장면들이 방영되기도 했단다. 교촌리는 크게 보아 둘, 마을회관이 있는 향교동과 자연부락 망북동이 합쳐져 있다. 


향교동 남쪽 끝에는 참샘이 퐁퐁 솜아나던 ‘참샘골’이 있는데, 그 집터들은 이제 대부분 대나무 밭으로 변했다. 북쪽 끝인 망북동에서 고샅길로 진입하면 새터이다. 훤출한 측백나무 담장이 반겨주는, 향교 뒷산 너머인 이 새터는 대나무숲과 키다리 꽈중나무들이 엉켜 있다. 옹기종기 비경인 인근 산속에서 덩달아서 숨박꼭질하는 인삼밭들은, 타지 사람들이 밭 얻어서 키우는 기업형인 모양이다. 


동네식당에서 입으로 다한 벼농사


고향 교촌리를 떠나살면서 비워둔 집에도 대나무는 치고 올라왔다. 17년 전, 군출신으로 부산에서도 살다가 빈집으로 돌아와 대나무를 모두 걷어내고 정착한 가족이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그 군출신아저씨집 모내기하는 날이었다. 좀 늦은 점심시간, 7명의 농군이 은진감리교회가 우뚝 서 있는 길 앞의 식당 “노다지”로 들어왔다.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이 동네 식당은 일시에 100여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이다. 7천원 하는 동태찌개가 인기다. 새끼보라는 메뉴도 걸려 있다.



기자가 취재한다고 해서인지, 막걸리에 이어 커피까지 한 시간여 머물면서 잠시 짬 내어 몸 눕힐 생각들은 안 하고, 연신 이야기꽃이다. 배고팠던 시절, 모내기할 때는 식구들 줄줄이 끌고나와 밥 멕였던 이야기부터 보리고개 이야기는 단골메뉴다. 보리가 익기 전 먹을 게 떨어지니 안 여문 풋보리를 일단 삶은 다음에 꺼내서 말리고 찧고 까불러서... 그러고 보니 “찧고 까부른다”는 말은 장난끼가 아니라 질곡의 수난사였던 것이다. 여름철 농촌 풍경은 풀과의 전쟁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그때는 풀이 남아나지를 않았단다. 땔나무도 떨어져 싸리순같은 거 눈에 뵈는 대로 족족 베어다 말려서 땠고, 짐승들 멕일 풀도 낫으로 싹싹 베어 한 지게씩들 했으니.... 


여전히 현역인 8순 노부부 옆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아주머니, 논일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 “내가 뭐 일 하남유~? 그냥 놀다 오는 거지!” 이 노부부는 아들이 귀해서 네 번째로 득남했다고 한다. 이런 유전자는  F2 손자대에도 그대로 득템된 모양이다. 자식과 자손들 위해 이 노부부는 평생 허리띠 졸라맨 채, 어디 놀러가고 돈쓰고 하는 일에는 두 눈 질끈 감은 삶이었다. 할머니의 눈길은, 메모하는 기자의 손끝을 연속 따라온다. 갑자기 군출신논주인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자존심 말여! 이름 정도는 써야니께 한글 배우라고 하면 다들 안 나와. 못 배운 게 뭐 쪽 팔린다고~?” 교촌리 바로 옆동네 출신인 황시장은 가는 곳마다 망신살 뻗친다. “우리 어머니는 한글도 못 읽었어요.....” 


서글서글한 식당 주인이 끼어든다. “우리집 가방 7개가 한꺼번에 다 걸렸어요. 30마지기 농사짓는 부농 일년 농사가 매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그 좋아하던 술도 딱 끊게 되더라고요.” 건축업도 했다는 주인장은 당시 건축이 ‘어두워서’ 돈푼깨나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남도에서 4H연합회장을 하면서 통일벼 나오던 시절 전국다수확상을 3차례나 했다는 주인장은, 색다른 농사 이론을 펼친다. “우리는 가물어 논이 쩍쩍 갈라져도 물 안 대요. 새끼만 많이 쳐서 문고병이나 도열병 자초하는 것보다는, 통풍 잘되고 하여 틈실해진 놈 몇이 제대로 커서 수확하는 게 알짜배기죠. 마지기당 5~6섬 나왔어요!” 그런 선진농법 여기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그러느냐? 거들었더니, 금세 냉기류다. “우린 그렇게 안 해두 다섯 섬씩 잘만 거둬!” 


지금도 부여에 벼농사를 짓는 식당주인은 화제를 돌리면서, 요즘 가뭄 걱정을 함께 한다. 쩍 갈라진 마당의 지하수 아무리 축여도 작물들은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는데, 엊그제 비가 오니까 작물들 때깔이 달라졌다면서, ‘하늘비’ 예찬 연속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가뭄보다 무서운 건 ‘일손’이라고 한다. 속이 타지만 하루 일당 쌀 한가마니짜리 용역 불러봤자 한창 일할 때인 4시 반쯤이면 짐 싸는 게 현실이란다. 



신기하게 이어지는 지속가능 한솥밥


4시반쯤이면 향교동 마을회관도 바빠진다. 동네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저녁 식사를 위해서다. 그런데 기자가 방문한 날은 3시부터 설렌다는 『어린왕자』 처럼 3시부터 술렁였다. 81세생일할머니 덕이었다. 생일 다 치르고, 풀도 깎아주고 하던 20여명 새끼들 다 보내고, 이제는 남은 먹거리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동네한바퀴 돌다온 이장과 기자는 운전 때문에 막걸리 마시면 안 된다며, 집에 다시 들어가 숨겨 두었던 감초수정과 페트병으로 한 병 들고 나오신다. 


이런 식이다. 여기 저녁은 식사하는 사람 숫자 미리 조사도 안 한다. 밥 짓는 거나 요리도 순번제로 한다든지 하는 계획성도 별로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렁저렁 큰 차질 없이 굴러왔다. 지팡이를 두 개씩 짚고 다니는 할머니가 옆 동네 흉을 본다. “내 몸이 이래도 건너동네 딸기밭에 팔려두 다니고 그래. 그 동네 보니까 회관에서 먹는 사람만 먹는다고, 나라에서 나오노 쌀을 가래떡으로 맹길어서 집집마다 똑같이 나누어 가졌대!” 잔치 끝에 의 상한다고, 남남끼리 한데 모여서 함께 밥해먹고 하는 일이 하루이틀 아닌 다음에야 의가 날 소지가 다분하다. 


신기하게도 향교촌 마을회관은 여지껏 큰 탈 없이, 시쳇말로 지속가능한 상황이란다. 제한된 예산으로 부식비 같은 게 모자라긴 하지만, 커피도 누가 사다놓고... 화수분이 따로 없다. 참샘은 기어 올리는 우물이라기보다 퐁퐁 솜아나는 물이었다는데, 참샘물은 메꿔졌어도 인정샘은 마르지 않은 모양이다. 동네를 살려온 우물이 둘 있었고 새터에도 하나, 이렇게 총 4개 있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고, 이제 우물가 이야기들은 마을회관으로 쏠려온다. 


8다이, 7다이, 4다이까지 다 모인 온동네 저녁식사는, 오늘은 생일턱 특별식으로 해서 넘어갔다. 올해 79세인 노인회장은 아직도 당신이 칠다이라며 껄껄이시다. 립써비쓰 달인인 기자는 81세 연상여인 3명을 미녀삼총사로 등극시키면서 4다이 여들학생에게 단단히 일렀다. “앞으로는 8학년 1반이라 마시고, 4학년 41반이라고 불러주세요!” 4학년에 방점을 찍은 것은, 동네 이장이 아직 숫총각이라며 제발 어디 가서 참한 색씨 하나 구해달라는 노인회장의 강청에 못 이겨서이다. 


이렇게 실한 총각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목청 높아지는 노인회장의 혼인 청탁에 민망도 하여 이장과 기자는, 미처 돌지 못한 자연부락 망복동으로 슬그머니 내뺐다. 언덕바지에 교촌1리 노인회관이 보인다. 왜 또 하나 더 있는지 물으니, 망복동과 용산1리는 지역적으로 가까워서 자연스레 한데로 어울어지는 곳이란다. 용산1리는 크기도 하여 거기 이장은 좀 떨어져 사는데, 거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면 사무소 일이 있으면 교촌리 이장이 이무롭다. 김창중 이장 명함을 보니 은진관아골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이다. 관아골은 면사무소를 끼고 있는 6동네가 ‘건강복지센터’ 등을 건립하는 권역사업인 듯하다. 


떡대가 실하니 벌어진 김이장은 산사나이다. 주말이면  충남산악구조협회 행사나 산악스키일도 나가고 돈 안 나오는 충남산악연맹에서도 감투 하나를 쓴 모양이다. 산악스키가 뭔지 물어보니, 스키를 탈 때 대개는 리프트로 올라간 다음, 거기서부터 질주를 시작하는데.... 산악스키는 리프트 없이 위로 올라가는 걸음마부터 시작하기도 한단다. 대전에서 화장품회사 최연소 지점장까지 할 때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  병 구완하느라 출퇴근을 고향에 와 하면서 귀농 아닌 귀농을 하게 된 케이스이다. 고샅길 어디선가 가스 냄새가 나온다. 가리지 않고, 가택무단침입중이다. 이러니 장가갈 새가 어디 있겠는가....



[은진향교 이야기]


“향교에서 국방부장관도 나왔대요!”



은진은 다이내믹한 이동권이다. 논산제1경이자 은진면의 심볼이었던 은진미륵마저 행정구역상 관촉동으로 이동하였다. 물리적으로는 조공을 실어나르던 은진 나루터가 이동하였고, 향교도 발이 달렸다. 은진향교는 1380년, 고려 우왕때 옆동네인 용산리에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인조때, 지금부터 376년 전 이 자리로 옮겨왔다. 인조 삼촌인 익성군이 30년 익산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용산리로 개장하면서 옮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연보상 1년 차가 나므로 신뢰하기 어렵다고, 채서기 사무국장은 해석한다. 


어쨌거나 그 즈음 이 동네는 신기원을 맞게 된다. 국가기관 향교는 그 주변 일대땅 대부분을 하사받는다. 지금도 교촌1리 땅의 대부분은 향교 소유인 상황이다. 광산김씨는 오래 전 이 동네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아가는 제 1세대들이다. 그 후손을 비롯하여 수대에 걸쳐 도지를 내고 살아온 83가구 주민들은, 여전히 향교와 동고동락하는 이웃이다. 도지는 주변시세의 1/4 정도라니, 그야말로 선의의 경제공동체이다. 



향교 안으로 들어서면 수령 340년의 은행나무가 다섯 갈래로 서 있다. 거대 줄기는 셋,  이를 가리키며 채 총무는 3강5륜의 표상이라고 의미 부여한다. 대문을 열고 내려다 보면 홍살문의 위치가 이상하다. 옆구리에서 진입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전면에 설치되어 있던 홍살문은 언제부터인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왔는데, 최근에 또 수난을 겪었다. 포클레인 기사가 트럭에다가 싣고 가다가 상단 창살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 사고 후 지금은 하단부가 돌기둥과 함께 단단히 옥조여 있다. 


향교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전학후묘! 후묘인 대성전(大成殿)에서 제향, 석전대제 등을 지내는 종교의식이 하나이다. 전(殿)은 궁전의 왕과, 대웅전에서 보다시피 석가, 그리고 공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궁중용어이다. 성스럽기에 피 색깔과 창살 모양의 홍살문이 있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워서 임금마저 삼가 걸어서 들어오게 하였다.  그런 길을 대형트럭도 거침없이 하이킥했던 것이다. 


전학후묘에서, 대성전 밑에 위치한 명륜당은 유학경서 공부방이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4서5경 외에 위서로 취급받던 명심보감, 천자문, 도덕경도 강론하고 일반학생에게는 인성교육 프로그램도 돌린단다. 유학생 기숙사인 동재는 양반자제, 서재는 그 밑의 유생들이 숙식하였다. 1630년부터 61년 동안 배출한 유생 중에서 부여서씨 서필원 병조판서가 최고봉이라고 한다. 


향교를 책임지는 직책은 장의, 직원 등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전교이다. 총무 재무 등 실제 향교일 전담자들은 최첨단 학문을 했던 분들이다. 동서양이 조우해가는 듯한 느낌을 뒤로 하면서 향교문을 나섰다.


[향교연락처(2017년)] 

전교 강원희 010-2944-5672 

총무 채서기 010-7244-1207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6-10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 은진면 교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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