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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Apr 28. 2019

물 넘쳐야 흙 살고, 곳간인심 나고...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은진면 토양1리

동네한바퀴는 야심차게 출발했다가.... 지금은 휴지깁(休止期)니다. 자칫 주마간산 수박겉핥기 되기 십상이어서 공을 참 많이 들여야 하는데,  나의 최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요.  토양리 같은 경우, 사람 만나는 일 외에 혼자서 둘러보는 것만도 너댓 번 했습니다요, 마치 부동산하는 사람처럼요!ㅋ 


요즘 마을사업이 다양화되면서 세종시 채택 사업 중에 “동네한바퀴” 프로젝트를 발견했습니다. 반가움과 동시에 농밀하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표해봅니다. 





70여 농가 200여 명이 사는 토양1리의 랜드마크는 우성사료이다. 논산 득안대로에서 연무대 접어들기 직전, 우측으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쭉쭉 빵빵인 고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 키다리들보다도 훨 치솟아 오른 철탑이 우성사료, 우성양행이고, 이 일대가 은진토양지구 농공단지이다. 주변의 길이름은 #연은로#이다. 연~은~ 이름이 참 예뻐서 무슨 사연일까 싶었지만, 연무대와 은진 첫 글자라는 추론이 금새 가능해진다. 한때 36개리였던 은진면은 현재 29개리로 줄었다. 토양리도 연무읍에 일정 부분을 떼어주었는데, 토양리는 연무대뿐 아니라 채운면 우기리와도 경계한 3개면 집결소이다. 


가중나무로 엮어 만든 가다리’ 


논산에서 연무대로 출발하면 은진사거리 지나, 방축리 방축교 지나면서가 토양리 초입이다. 방축교는 꺼먹다리라고도 부른다. 시묘리에서 시작된 시묘천은 이 다리를 분기점으로 하여  방축천으로 개명이 된다. 은진 남산리쪽에서 흘러나온 물을 받아들인 다음 채운면 용화교를 지나 원목다리에 이르른다. 여기서 잠시 강경으로 향하는 호남선과, 연무대로 갈래치는 강경선의 분기점 채운역에 눈길을 준 다음에, 논산천안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다가 영창교 통과 이후 논산천과 합수한다. 


논산천은 탑정리 저수지물을 콸콸 내보내어 이제는 논뫼들 대부분을 적셔주지만, 예전에는 방죽이 젖줄이었다. 양질의 토양이라서 지어진 이름 토양리(土良里)는, 그 이전에 물, 방죽이 있었다. 지금은 그 방죽이 매립되어서 방죽안(제내 堤內)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50마지기 정도의 넓은 방죽이 토양1구와 2구 양쪽에 공히 있었다고 한다. 채운 배꽃, 우기리 등에서 관촉사로 가려면 통과하는 길목이 가다리, 지금 토양사거리 부근이다. 허리까지 빠지는 수렁재지대에 다리를 놔야 했다. 세로로는 키다리나무인 가중나무를 대들보로 놓고, 가로로는 철길처럼 작은 나무를 댄 다음 나래짚 깔고 그 위에 흙을 얹고 하여서 교량 작업을 하는 데 꼬박 이틀 걸렸다. 그때 다리를 가중나무로 놔서 ‘가다리’라고 불렀다. 


이제는 담배나 술 정도만 팔리는 사거리 토양수퍼 주인 김덕중 옹의 증언이다. 올해 81세인데도 펄펄 날면서 농사일 다 짓는 노익장인데, 당시 방주 안에는 가물치 메기도 많았다고 덧붙인다. 인간의 말이라면 우직하게 잘 듣는 소가 실은 영물이란다. 구루마나 쟁기를 내둥 잘 끌고가다가도 가다리 앞에 서면 앞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는다. 흙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방어본능을 발동해서란다. 


지금 마을회관 앞마당에 500년 된 엄청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동네 문지기 수호목이었던 듯싶다. 그 나뭇가지가 휘어져 길 건너편 땅 속으로 파고들었고, 거기서도 뿌리가 내려 나무 터널이 되었다. 그 동구나무 밑에서 방축리, 심암리,우기리 사람들 너댓 명이 와서 한 조가 되어 깃발 들고 풍물 치면서 두레쌈이 벌어지곤 했다. 성냥도 없던 시절, 마른 쑥에다가 부싯돌 불을 붙이면서.... 그러나 이런 진풍경도 근대화의 물살에는 결국 휩쓸리고 만다. 길을 내려면 거목을 베어내야 한다고 했을 때 동네사람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흔히 등장하는 후환 이야기를 물어보니, 그 후 사람도 죽어나갔다고 한다. 이런 증언들이 다소간 몽환적으로 들리는 것은, 이 주변이 변해도 너무 변했기 때문이다. 


아참, 거먹다리 이야기! 1941년 시멘트로 바뀐 방축교는, 최초에는 검게 그을은 나무로 놓았다고 해서 거먹다리이다. 편한 길 가다리로 지나가다 보면 남자들이 시야까시하는 일이 있어 냇뚝인 거먹다리 쪽으로 돌아가는 아녀자도 있었다고 한다. 토양리 방죽은 동네 사람들 위주로 물을 대주었지만, 모내기철 주변 마을에서  요청하면 그때는 군말 없이 물꼬를 터주었다. 



회관짓는데 차 1000시청 100번 


토양사거리 북쪽, 그러니까 연무대에서 논산쪽으로 오는 길의 오른편에 지금은 찜질방과 무인텔로 사람들이 몰리지만 예전에는 말과 사람이 몰렸던 마장(馬場)였다. 군마를 먹이던 곳이라고 해서 마장, 마당터로 불리는 이곳에는, 우시장처럼 말 판매도 이루어진 모양이다. 민가로는 두 집만이 존재하는데, 13년째 마을 재무를 보는 장근세 씨의 집이 그 중의 하나이다. 


기자가 방문하는 날 아침, 노인회장 겸직인 이용규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고 제안했더니, 동네 업소를 소개해줄 요량에서인지 식사도 가능한 골드사우나찜질방을 얘기했다. 확인해본 결과 본인들이 직접 하는 식사만 가능한 곳이라서 불편하니.... 홍릉가든 김치찌개가 어떤지 물어본다. OK라고 대답했지만, 최종 결론은 마을회관에서 국수말아먹기! 도착해 보니 동네분들 20여 명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다. 부녀회장님이 분주하다. 눈치로 보아하니, 오늘 이장님이 스피커로 급하게 연락하여 이참저참 동네잔치를 벌여놓은 모양이다. 마을회관은 대개 아줌마들이 더 북적이는데, 토양리는 반반 쯤이다. 후식으로 수박을 먹고나서도 남정네들은 집에 가지 않고 원두막으로들 올라간다. “놀면 뭣해?”하면서 10원짜리 불꽃 경쟁이 벌어지는 경마장이다. 현판 초서체 초현정(草峴亭), 지시하 전면장의 글씨가 달린다. 땅이 비옥하고 말 먹일 풀이 잘 자라 토질이 좋다는 의미의 초현은, 마당터 서남쪽 가다리의 별칭이란다. 


예전에 상당히 저지대였던 이 자리에 마을회관하나가 들어섰다. 기자 같은 과객의 눈에는 나라에서 돈 대주어 뚝딱 지어진 건물로만 여겨졌는데.... 자초지종 얘기가 길어진다. 지금 공단쪽으로는 산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둠벙 저지대였다. 마을회관 자리는 시유지였고, 그 시유지를 어찌어찌 불하받아서 마을회관 자리로 확정하였다. 공단이 들어설 자리에서 나오는 흙을 제때제때 받아다가 5m 이상의 저지대를 메꾸는 데 덤프차가 1천 여번 오갔다. 농사짓던 시유지를 불하받고 형질을 변경하고, 건축비가 모자라 700평 중 절반은 팔아버리고, 그러고도 돈이 모자라 공단입주업체를 찾아가 건축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올해 이장 경력 14년째인 이용규 이장은, 장근세 재무와 함께 시청을 1백 여회 드나들었다고 한다. 중간중간에 지시하 면장이 시청에다 전화를 넣어주지 않았으면 아마 2백번도 넘었을지 모르겠다고 농담 겸 이제는 여유로운 후일담이다. 이런 와중에 업자로부터 커피 한 잔 얻어마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딱 한번!  첫 상면하는 날 공무원들과 함께 점심 얻어먹은 일이 있었다고 토로한다. 법학을 전공한 재무는 동네에서 감사패까지 받았는데, 김영란 법 발효 전이라며 한바탕 웃음이다. 이장과 재무의 장기집권 비결을 파악이라도 하려는지, 차기 후보인 마을총무는 염화시중 미소로 일관한다. 


마을회관이 있고 없고는, 천양지차이다. 공간적으로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마을다움을 지켜주고 결속력을 다져주는 구심점이어서이다. 마을회관에는 외지 장사치들도 단골이다. 이장의 안내로 동네한바퀴 돌다가 다시 와보니, 마당에 작은 트럭 하나가 서 있다.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하는 두부장사란다. 가서 대화를 청하니 청산유수, 걸쭉한 목소리가 좔~좔~좔이다. “요즘 젊은이들 일자리 없다고들 아우성인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배부른 소리로 들려요. 내가 이 두부 장사를 22년간 하면서 애들 보란 듯 키웠는데, 이런 장사가 쪽 팔리면 잘 못 알아보는 딴 동네 가서 하면 되고....”  


어쩌다가 시장에서 시골 아줌마들 만나면 볼멘 목소리란다.  “왜 필요한 때 나타나지 않는 거여?”  “전화만 주면 새벽에라도 가서 아줌마 찾기 편한 곳에다 가 고이 모셔 두고 갈 거이니까...” 그러나 천하의 아이디어맨 두부아저씨, 여지껏 시골 실정에 어둡다. 그 전화번호 스티커 제대로 건수할 시골노인네, 대체 몇 분이나 될꼬? 두부 한 모에 1500원, 이장의 호출에도 불응하던 새마을지도자 부부가 논일 하다 말고 들어와서는 두 모를 사니, 두부 아저씨 이제는 차에 시동을 건다. 

새마을지도자와 22년 두부장수


커피도 서빙하며 동분서주하던 지도자의 아내, 주방에 들어가 그 두부 숭덩숭덩 썰어갖고 나오자 마을회관 초입은 갑자기 술판 술람미다. 때아닌 회관 전화통이 따르릉 울린다. 장수 사진 찍어준다는데, 힘센 이장이 TO 하나 늘여서 6통반장에게 농협하나로마트 가서 빨리 사진 찍고 오라 전갈했더니만, 엉뚱한 데 가서 헤매다가 전화한 모양이다. 그것도 이장이 쓰는 017- 번호 몰라서 집전화로 걸은 것이다. 대학원까지 나왔다는 재무도, 컴퓨터는 당체 모르겠다고 오리발이다. 회관에서 정보화 교육 안하는지 다그치듯 물었더니, 배울 때 그때뿐이라며 여전히 위풍당당..... 


마실과 효부상 두번 탄 이야기 


회관에서는 아줌마들이 뭣하며 노는지 궁금하여 할머니 방을 노크하였다. 수도꼭지에 꽂기만 하면 수돗물이 황금물로 치환된다는 환상의 제품 카탈로그가 펼쳐져 있다. 병원, 요양원, 보조식품 등 건강관련업체에서 출입이 잦은 모양이다. 아저씨들처럼 놀면 뭐하냐며 한판 벌이던 아줌마들이 집에 갔다온다고 하는 바람에 별 소득 없이 멀쓱 나오려는데, 저녁때가 되면 4명이 잠자러 온다는 귀띔이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도록 하는 땅거미와 합동작전으로, 기자는 동고동락 침소를 급습하였다. 10원짜리 쌈지주머니를 내놓고 혈투중이었는데, 마침 부녀회원 한 명도 끼어 있었다. 요즘 회관에는 백세행복과에서 찾아와 체조교실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찾아와 마술도 보여주고 책도 읽어준다고 한다. 오늘처럼 마실 와서 할머니들과 함께 재미있게 듣는 재미가 연속극보다 훨 낫단다. 일치감치 이불 깔아놓으신 구순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할머니는 낮 동안 안 계시던데, 주로 뭐하며 지내세요?” “몰라, 연무대 어디에서 차가 와서 거기 가서는.... 점심도 먹고.... 종일 놀다보면 다시 여기 데려다 줘!” 자식 없는 걸로 되어 있어서 무료로 Day-Care 주간보호센터 다니시는 거라고, 손자 7명이나 두었다는 젊은 부녀회원의 통역이다. 


낮에도 자리 지키고 있던 90도 할머니는 허리 수술을 했는데, 설상가상 다리까지 다쳐서 병원비로 돈 천 이상 들어갔다고 한다. 회관에서 자는 것은 혼자 사는 할머니로서 토양1리는, 이틀에 한번씩 당번제처럼 순환하는 모양이다. 겨울에는 따십게 잘 수 있고 여름에는 에어콘 틀어주니 낮 동안에도 동네할머니들이 들어와 오수 즐기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물이 가득한 페트병들이 나뒹굴길래 용도를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방의 목침은 딱딱하고 솜이불베개는 때 잘 타고 그러는데, 언젠가 누군가 제안한 페트병은 4계절 베개로서 딱”이라고 답하신다. 


이런 살림의 지혜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공동생활은 지혜가 모아지고 말벗도 되어 한식구처럼 친해지기도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래도록 혼자 사는 게 몸 깊숙 배인 분들은 오히려 불편할 수도...... 새터에서 80세된 할머니를 만났다. 왜 동고동락에 동참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멀기도 하고, 차라리 혼자 사는 게 편하시단다. 차를 슬슬 몰며 담장 너머들 엿보니, 마루 소파에 덩그라니 앉아 계시는 노인들이 간간 눈에 뜨인다. 농공 복합체가 되어 버린 토양리의 저녁풍경만은 아닐 성싶다. 


요즘 마실은 시골이라도 쉽지 않은 듯하다. 한복순 부녀회장의 집 앞마당에는 정겨운 찜질방이 하나 있다. 소방서 다니는 아들이, 어머니 겨울에 따십게 지내시라고 지어준 집 한 채 선물이다. 그러나 금새 큰동네(안동네) 할머니들 놀이방이 되었다. 먹을 걸 싸갖고 오시는 분도 많았지만 이게 하루이틀 아니다 보니, 틈새시장은 며느리 모가치였다. 효부상 받을 만하다. 1년여 전 돌아가신 후로는 아무래도 동네어르신들 발걸음이 뜸해진 모양이다. 


마당터 장근세 재무의 집은 100세 효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10여 년 전에 큰 아들 따라 건너간 미국생활 정리하고 귀국한 시부모님 두 분을 하늘나라 갈 때까지 정성껏 모신 결과이다. 3남2녀 중 막내인 장 재무의 부친은 함경도 청진사람이다. 6·25때 울산으로 피난 갔다가 3살짜리 장재무는 소아마비라는 전쟁선물(?)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을 따라 토양리에 정착한 때는 60여 년쯤  전이다. 


큰 형인 장근호 박사는 미국 Z추진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최순달 박사와 함께 한국으로 스카웃된다. 삼성연구소보다 앞섰던 금성사연구소(지금은 LG연구소)에서 일할 때, 1986년 대통령상인 석탑산업훈장상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 이동통신은 SK공화국이지만 당시 맞대결을 펼쳤던 쌍룡 시절, 자가용비행기가 있었고.... 쌍룡 시절을 거쳐 항공우주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장박사는, 항공우주연구소 소장까지 올라간다. 99년 항공주연구소에서 나온 직후, 그가 추진했던 아리랑1호가 발사되었다. 최순달 박사는 우리별을 쏘아 올렸다. 한국과학사의 획을 긋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러나 퇴직후 대전에서 불붙인 벤처기업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천재과학자의 부모는, 장남이 아닌 애틋 막내의 집에서 노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땅 살려주는 물물물


천재과학자는 타지에서 선전했지만, 동년배로서 논산에서 맹위를 떨쳤던 사람이 있다. 조합장을 5선이나 역임한 올해 80세, 덕은이씨 이영선 회장이다. 목소리가 괄괄한 김덕중 수퍼아저씨와 얘기가 되어서 다음 날 약속을 잡은 것이다. 


토양수퍼가 있는 1번 국도는 그야말로 전국제1의 교통 요충지이다. 수퍼아저씨는 산전수전 다 겪다가 고향 돌아와 지금도 여전히 젊은이들 못지않게 농사 짓는 자수성가형 농부이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멍석말이를 당했단다. 장질부사(장티푸스)는 떨이가 하루 걸러서 발동하므로 ‘하루걸이’라고도 불렸다. 이 병은 깜짝 놀라면 떨어진다고 하여서, 어린 것을 가마니에 둘둘 만 다음, 프랑스의 단두대처럼 소여물 작두 위에다가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생사고락은 6학년때 맞은 6·25때도 따라다녔다. 인민군 천하는 3개월 정도였다. 학교에 가서는 인민군 지시에 따라 돈 없이도 담배 사다주고, 귀가 후에는 동네에 들어와 큰 부자집 잔심부름을 하였다. 부자집이란 다름 아닌 이영선 친구의 집이었다. 자기는 가방끈이 짧지만 그 친구는 부자집 아들답게 길어서 은진 논산에서 농협조합장을 5선이나 하였다. 의원도 2선이나 한 지역 유지로서, 현재는 논산시 의정동우회 회장이다. 당시 이 동네에는 큰 부자가 네 집이었는데, 그 중 그 친구의 큰집과 작은집은 함께 살면서 담장 안에 다섯 채의 집이 있었던 것이다. 대저택을 접수한 인민군들이 그 지주집을 사무실과 숙소로 이용하면서 개 소 도살하던 현장을, 주인인 이영선 친구보다 훨 더 생생히 이야기한다. 


당시 떵떵거렸던 네 부자가 현재는 이영선가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다 떠나고 쇠락했다고 들려준다. 은진면 전체로 볼 때 당시 최고 부촌은 방죽을 끼고 있던 인근 마을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피난촌 와야리와 오지 시묘리가 상전벽해가 되면서 순위가 급반전되었다. 토양리 사람들은 더 이상 큰 인물이 배출되지 못하는 원인을, 방주못물에서 찾는 듯싶다. 길 낸다고 500년된 느티나무 싹뚝 베어내고, 경지정리한다고 그 큰 방주 다 메워버리고 ... 예전에 토양리 방주는 넓이가 몇 천 평 되어서 겨울이면 논산읍내 사람들이 스케이트 탈 곳을 찾아 이곳에 합승버스를 타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토양2리에는 그 방주보다 더 큰 방주가 있어서 일대가 고라실였고, 문전옥답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영선 5선 조합장(좌: 80세)과 김덕중 토양수퍼 주인(우: 81세)


선대의 부를 잘 유지하고 키워낸 이영선 조합장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다. 성실! 그러고 보니 이조합장은 홍능가든 밥상에 올라온 반주술도 밀쳐낸다. 살아오는 동안 숱한 유혹도 물리치고, 현재도 매주 일요일 아침 6시에 모여서 하는 조기축구 멤버란다. ‘동축회’라고 30여년 전 논산에서 결성된 최고 오래된 축구단 회장이다. 80대도 한명 끼는 전국 축구대회 수상 경력도 있다. 치열한 자기관리의 단면이 엿보인다. 


인근 업체에 떡을 갖다주며


죽마고우인 김덕중 옹의 부친은, 돈이 없어도  주막거리 술 다 팔아주고 투전까지 했던 모양이다. 가족사 포함, 본인의 삶이 파란만장해서 이제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다. 동시대 죽마고우이면서도 부자아들 뇌세포의 기억부위와 교집합이 적음을 강조하며 술자리 대화를 주도해간다. 그러나 물에 관한 한, 부자아들의 기억이 더 많은 듯싶다. 지금도 토양리 논 속에는 300년 넘은 우물이 있단다. 흘러넘치므로 두레박도 필요없이 바가지로 뜨는 샘물인데, 이런 물이 곰밭, 토양3구 등에도 있었다. 


이런 물의 음덕으로 내심 덕은이씨의 중흥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영선 회장은 덕은이씨 21대손이다. 그러니까 약 600여 년 전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온 덕은이씨는 은진, 마산리, 가야곡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덕은골 은진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골드사우나찜질방 뒤편에 덕은이씨 시조비가 둔중하게 서 있고, 매년 음력 3월 보름날에는 시재를 지낸다. 


이용규 이장&노인회장(아직까지 현직인지, 덕은 이씨인지는 확인 못함ㅠ)


시재를 지내는 날은 동네잔치날이다. 공식적인 동네잔치는 정월대보름과 칠월칠석날이다. 이 때는 떡을 하여 동네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공단에도 돌린다. 상장업체를 위시한 대기업체가 5개 이상이고 중소기업도 꽤 된다. 업체에서는 동네잔치를 위해 희사금도 낸다. 농공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중 한 방위산업체와는 교류가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총탄을 깎아내는 작업 과정 전후에서 나오는 산업폐기물로 인해 지하수 오염 같은 걸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란다. 실제 돈이 없어 상수도를 집까지 못 끌어온 영세민은, 아직도 지하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동네 살면서도 담장 높이 쌓은 채 깜깜이웃인 현실이 안타깝다고 이장은 토로한다. 공단에서 동네사람들 취업은 우선 시켜준다고들 하지만, 정작 일하러 갈 사람은 별로 없단다. 


부녀회도 12명 정도인데, 대부분 농사일보다는 수입이 높은 타지 일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란다. 부녀회원끼리는 작년에 중국여행도 다녀오고, 알콩달콩 재미지게 살아간다고 보험경력 26년차인 김순자 총무가 자랑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숫자얘기, 섣불리 꺼낼 곳이 아닌듯싶다. 


두부아저씨 22년, 이장단 14년, 5반반장아저씨 농민회 경력 30년, 조합장5선... 인근에서 도시농업 수경재배기를 만드는 만드는 ‘근옥’이나  대기업 ‘우성’ 그리고 길건너 논산딸기랜드의 직원수..... 마을회관 바로 옆 숲정이영농조합은 방울딸기 선별작업이 한창이다. 회원수 물어보니 300농가.....


[글·사진] 이지녕

이 글은 『놀뫼신문』 2017-06-16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다같이 돌자 동네한바퀴 : 은진면 토양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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