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

by 김거인


“당신은 혼자 있을 수 있나요?”


나는 늘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사회생활을 하는 한, 아니 살아있는한,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어딘가 가야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우리는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분리하여 들여다 볼 물리적 시간이나 공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그렇게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채 밤을 맞이하고 또 아침이 온다. 그런 시간이 지나다 보면 관성이 붙어 가만히 두어도 하루는 그렇게 흘러가고 1년이 되고, 10년이 된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예외적인 틈이 발생하는 경우가 생기면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라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는 금요일을 불로 태워버릴 생각으로 주중을 버틴다. 그리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했을 때 은근히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주말에는 특별한 곳에 가서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또 한 주를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불금을 혼자 보냈어요”, “이번 주말은 나 자신과 이야기를 하며 보냈죠” 라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험삼아 한번 그렇게 얘기해 보라. 당장에 세상 불쌍한 사람이라는 표정의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썸씽 스페셜한 뭔가를 하고 있는) 나는 틀리지 않았어’ 라고 느끼는 그 시간들 중에는 사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잘 맞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의미 없는 시간들도 섞여 있다는 것 또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과 연결되어 나의 족적을 남기고 영향을 주고 싶다. 그건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이룩하고 싶은 목표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는 강력해서 그 부분에서 결핍이 생기면 사람은 매우 단기간에 나약해질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이를 느끼는 예민함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치가 낮은 사람일수록 더 빠르게 누군가의 온기를 갈급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단기간에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타인을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거나 함께 이야기를 하거나 음식을 나누거나 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쉽게 혼자가 아님을 확인 받을 수 있다. 무리 생활을 하던 인류가 혼자 낙오되면 생존확률이 급격하게 낮아졌을 터이니 이러한 근원적인 공포는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만큼 외톨이가 되는 것은 공포스럽다.


게다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타인과 교류함으로써 혼자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여러가지 것들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인간의 그러한 특성 덕택에 문명이 발생하였고,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혼자 있을 수 없어서 타인을 찾는 거라면 그건 반쪽짜리이다.


자기 자신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쁘다 바쁜) 현대인들은 ‘나’ 를 방치해두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때 우리는 그 하나로 완벽한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곧 부모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그 본성에서 멀어진다고 한다1). 그렇게 진짜 자신을 망각한 채 현대를 살아가다 보면 ‘진짜 나’와 ‘세상 속의 나’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서로를 잘 모른채 데면데면해 진다. 만약 당신이 몇 십년 간 연락 한 번 없었던, 그 존재만 희미하게 기억나는 소꼽친구와 갑자기 만나 단 둘이 한 방에 있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뼛속까지 불편감이 밀려오지 않겠는가? 나는 이것이 현대의 우리가 겪는 여러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 나는 나를 모르고, 당신은 당신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가족으로부터 들어온 것, 학교에서 배운 것, 직장 혹은 매체에서 쉴새 없이 떠들어 대는 것들을 짜집기해서 대충 세상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 세계관에 내가 있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어울릴 만한 나의 모습을 만들어 끼워 맞춘다. 그리고는 “틀리지 않았어” 라며 안심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진짜 나’ 와의 간극이 근본적인 공허함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하는 물음은 ‘진짜 나’를 모를 때는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런 대답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던 어렸을 적 ‘나’ 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나’ 를 잘 알면 알수록,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러한 근원적인 질문의 해답에 가까워진다. 그럼으로써 어설프게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의 모습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친이 된 ‘진짜 내’ 가 든든하게 뒤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누군가의 질타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그런 존재를 원한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를. 어렸을 때는 부모가, 커서는 친구 혹은 연인이 그런 존재가 되어 주길 바라며 기대를 하기도 하고 착각을 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지만, 나의 그런 욕구가 너무 크면 일정 선을 넘어버리기 쉽상이다. 나의 결핍을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그 관계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기에 시작은 가능할 지라도 말이다. 만약 운이 좋지 않아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양육자를 만나지 못했거나, 그걸 만회해 줄 수 있는 친구나 연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늘 결핍된 채로 허덕거리며 살아야 할까? 이미 다 자라버린 나를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다시 양육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인생은 망했어’ 하며 포기해야 할까? 그럴리가 있겠는가. 앞서 말한 ‘진짜 나’는 사실은 폭발적인 힘을 가졌다. 겉모습은 어린 아이인데 사실은 세계관 최강자인 최종보스라고나 할까. 그런 그 아이가 어디도 가지 않고 줄곧 내 옆에서 나를 지지해 준다면 어떨 것 같은가?


사실 나는 한동안 무기력증을 앓았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실제로 퇴근 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냈다. 일어나 앉아있을 기력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이유를 몰랐기에 그저 ‘게을러서’ 혹은 ‘운동 부족’ 이라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거나 지인을 만날때는 그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집에 와서 혼자 있게되면 줄곧 그랬다.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이 미친 것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코 유쾌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다 ‘COVID 19’ 로 인한 대대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으로 인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극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건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어릴적부터 뭔가를 혼자하는 걸 좋아하는 내향적 성격이라 혼자 있는 걸 잘하는 사람이라고 꽤나 자부했다. 그만큼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는 것을 외부와 차단된 채 나와 많은 시간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많았고, 사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해주고 있지 않았다. 내 모습으로 있기 보다는 다른 사람 눈에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의식하며 적당한 모습으로 꾸미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피로가 누적되다보니 점점 무기력해져갔고 ‘진짜 나’ 또한 말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의 대화가 늘어나고 서로가 점점 친숙해지면서 더는 이 아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게되었다. 그동안 전혀 손대지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나씩 시작했다. 좋지 않은 관계를 끊어내고 내게 상처가 되는 일들을 그만 두었다. 먹는 것에 신경을 쓰고, 건강도 돌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무기력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몸 안에서부터 차오르게 되었다. 내 안에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내가 겪고 있었던 여러 문제들은 ‘나’ 를 방치해두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진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돈을 많이 벌면, 차를 사고 집을 사면, 가정을 꾸리면 행복해질까? 물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형태의 것을 성취해 내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은 두 달을 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어찌되었든 내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 뭘 할때 행복한지에 대해 외면한 상태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감히 행복이란 ‘진짜 내’ 가 원하는 것과 ‘세상 속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줄다리기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인을 만들 때 처럼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시간을 내어서 세심하게 지켜보고 배려를 하고 관심을 갖고 물어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깨어서 내가 지금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바라 봐야 한다. 삶은 계속되기 때문에 나와의 대화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속되어야 한다.


나는 주변에서 같이 있지만 실은 같이 있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늘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기껏 만나서는 어떤 교감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간만 떼우다 헤어지는 사람들, 카페에 앉아 각자의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있는 연인들.. 상대방이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서로를 정말 의지하는 마음에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관심하지만 상대의 온기만 취하고 싶은 얄팍한 관계들. 그런 태도는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도 한 번쯤은 자신에게 물어봤으면 한다. 정말 혼자 있을 수 있는가?




1) 제임스 홀리스(2019). 남자로 산다는 것 (김현철 역).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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