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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ob 심지아 Mar 22. 2020

생필품 사재기의 현장에서

휴지 is new gold

3월 12일 목요일


점심을 먹고 나서 치우고 일을 하고 있는데

딸 학교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때문에 

학교 방역을 위해

다음주 5일간 휴교한다는 내용.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될거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메일을 막상 받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원래는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

딸을 학교에 내려준 다음에

남편과 뉴져지에 가서

한국 마켓도 가고 코스트코에도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올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오늘 바로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며칠간 퀸즈 플러싱에서는

쌀이 동이 났다는 소식,

미국 사람들이 화장실 휴지를 사재기한다는 뉴스,

혹시 몰라 늘 여유분을 마련해두는

어린이 해열제를 사러 3군데나 약국을 돌았어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내일까진 학교가 여니까

내일은 애를 학교에 보내놓고 

우리끼리 편하게 가자는 남편에게

아니야. 지금 가는게 좋겠어.

지금 바로 애를 픽업해서 뉴저지로 가자.

그냥 내 말 들어.

둘 다 하던 일을 내던지고

학교로 향했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데리러 왔는데도

남아있는 애들이 세명밖에 없다.

딸아이는 애프터 스쿨을 5일 다 하기때문에

주로 맞벌이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과 함께라

5시 전에 데리러 가면 늘 애들이 가득있었는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마음이 조금 더 급해졌다.


뉴져지에 있는 대형 한인마켓을 먼저 들렀다.


사람들이 다 그 구하기 어렵다는

마스크들을 어디선지 잘도 구해쓰고 

비장한 표정으로 카트를 밀며

부산히 다니고 있었다.


평소에 다양한 브랜드의 쌀이 있던

곡류 코너에 쌀봉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저쪽편에 비닐 포장이 과격히 뜯긴

딱 1종류의 쌀푸대들이 쌓여있었다.

평소 쌀은 좋은걸로 골라서 사는 편인데

그런 여유가 없어서 일단

한봉투를 담았다.


물건을 쌓아놓을 생각으로 간것이 아니었는데

말 한마디 없이 마스크를 쓴채

어두운 표정으로 

물건들을 카트에 와르르 쓸어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막상 내게 필요한걸 나중에와서는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넉넉히 사야할텐데 뭘 사는게 좋을지.


작은 냉장고를 가진 부엌의 

맨하탄 아파트에 살면서

최소한의 것만 냉장고에 넣어놓고

과일 야채 고기는 그때 그때

집 앞 유기농마트에서 사서 먹다가

갑자기 이런일이 생기니

뭐부터 어떻게 사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얼마전에 주부 친구들이

쌀이 미친듯이 팔려나간다더라,

휴지가 없다더라.

빨리 다 사서 쌓아두라는

연락을 해올때마다

난 사재기에 반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필요 이상의 패닉으로

물건들을 사서 쌓아놓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안감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어찌하는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필요이상으로 패닉하지 말고

일단 다음주랑 그 다음 며칠정도는

충분히 먹을수 있는 정도에

비상 식량 조금만 추가로

준비해두자는 남편.


비상 식량이래도

뭘 사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평소에 장 보는대로 장을 보고

보통때는 먹지도 않는

캔참치 6개,

스팸 고민고민 끝에 3캔,

고형 카레 2개

라면 짜파게티 5개들이 1봉지

진라면 5개들이 2봉지

맵지 않은 컵라면 몇개,

식사처럼 먹을 수 있는

초코파이, 커스터드파이,

과자류를 담았다.


김치는 남아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한국인은 비상시에 역시

김치 쌀 라면을 확보하는구나.

잘 알면서도 다시 한번 새로웠다.

이후에 딸 학교 학부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한국인은 김치 없이는 살아남을수가 없잖아?

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그런가.


근처 코스코로 향했다.


한국마켓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고

주차자리를 찾는것부터가 전쟁터같았다.


물은 아예 없었고

화장실 휴지나 페이퍼 타월도 없었다.

휴지나 페이퍼타월은 당분간

쓸만큼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살 생각도 없었지만

그런것들이 가장 먼저 팔려나가는게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물을 살 수 없으니 좀 불안해져서

아이 쥬스를 두박스 샀다.

우리는 스파클링 워터를 구입했다.

씨리얼 대용량 한박스에

봉지 팝콘이라든가

치즈, 파스타 소스같은것을 사고

평소보다 길게 줄을 서서 계산을 했다.

줄을 서있는 동안

소리를 치며 싸우는 사람들을 봤다.

기분이 착잡했다.


나와 내 이웃들의 갖가지 나약함을

목격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뉴저지에 온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며

돼지갈비를 먹으러 한국 음식점에 들렀는데

사람이 아주 많았다.


조금 전 마트에서 본 사람들과

여기 앉아서 된장찌개 뚝배기에 숫가락을

섞으며 소주를 건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일까 다른 사람들일까.


정신이 없이

목요일이 지나갔다.


집에 와서 비상식량이랍시고

산것들을 풀어 보니

무슨 캠핑가는것도 아니고

다 불량식품에 꼭 소꿉장난같았다.


전쟁이 난것도 아니고

혹시나의 경우 며칠 식량만 있으면 되겠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 불량식품들을 신발장 안쪽에 쌓아두니

그래도 좀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재기를 해두는걸까.

옳지 않다고 주장해왔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무력감대신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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