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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Oct 21. 2020

神을 기다리자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29회)

  “오직 순정한 창조의 순간만 허락해 주기를”

       

  처음부터 참신한 발상과 큰 성공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낯선 곳에서의 작업이 그저 마음 깊이 침전된 묵은 관성의 찌꺼기를 뒤흔들어 주기를, 상하좌우를 뒤틀고 낡은 기억과 오지 않은 미래를 뒤섞어 일대 혼돈의 풍파를 일으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혼탁한 정신의 대기(大氣)가 미구에 닥칠 우발적 탄생의 순간을 예비해 주기를, 오직 그러한 순정한 창조의 순간만 허락해 주기를.


  떠들썩한 삼일절 100주년 당일에 고즈넉한 강원도의 한 시골로 향하는 마음은 시인으로서는 솔직한 자기 토로에 가까웠다. 절대주의자인 듯 혹은 유미주의자인 듯 시를 갈망하는 마음은 시에 이르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결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에게 삼일절의 민족사적 의미와 국제정치적 맥락은 언제나 부차적이다. 아니다, 자신을 온전히 시에 바쳐 시로써 민족어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민족사적이지 않은가.


  정부와 관계 기관마다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한 삼일절 100주년은 무엇보다 광화문 일대의 교통 차단과 함께 왔다. 또 서울 외곽으로 나가는 대부분 도로의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나타났다. 기념 행사장의 교통 차단과 황금연휴를 즐기려는 초봄의 교통체증은 서로 모순되면서도 공존했다. 이것도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인가.


낯선 곳에서의 작업이 그저 마음 깊이 침전된 묵은 관성의 찌꺼기를 뒤흔들어 주기를, 상하좌우를 뒤틀고 낡은 기억과 오지 않은 미래를 뒤섞어 일대 혼돈의 풍파를 일으켜 주기를...


  강원도 횡성군 ’예버덩문학의집’은 아늑했다. 주천강 느리고 완만한 물길에는 만곡의 여유가 있었다. 아직 갈색이었지만 산의 높이와 물의 깊이는 풍경에 심도를 더해 주었고, 물을 따르는 땅의 곡선과 산세의 다채로운 기울기는 완연한 입체감을 주고 있었다. 예버덩은 ‘옛 버덩’(古坪)이다. 버덩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집을 지어 문인들을 부르고 그들이 장차 자신의 작품에 자기 영혼을 오롯이 바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사람은 그들의 작품이 ‘높고 평평하기’를 바란 사람일 터다.


주천강은 아직 갈색이었지만 산의 높이와 물의 깊이는 풍경에 심도를 더해 주었고, 물을 따르는 땅의 곡선과 산세의 다채로운 기울기는 완연한 입체감을 주고 있었다.


  예버덩의 아침은 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에 어쩌다 눈이 뜨여 엉거주춤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때부터 조금씩 열리는 하늘과 굴뚝과 연기. 창을 통해 펼쳐지는 연기의 불규칙한 운동은 이 마을이 어떤 심층적 원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에너지의 양과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하얀 상승. 임계점을 넘긴 허공의 높이에서 활짝 열리는 유려한 곡선. ‘신을 기다리는’ 예버덩의 첫 아침은 내게 그런 부드러운 원형의 풍경을 선사했다.


  어찌하랴. 서울을 떠난 새들은 모두 예버덩에 와 있었다. 고향을 떠난 새들이 서울에 살다 서울을 떠나 고향에 온 듯 새들은 아침 풍경의 정수리에서 맑은 음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많던 새들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새들은 패망한 왕조가 아니라 강역(疆域)을 넘나드는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고 있었다. 새들의 섭생과 생식과 자기 방어와 같은 생물학적 관심은 애초부터 접어두기로 했다. 새들과 무관하게 새들은 자유롭고, 새들과 상관없이 새들은 ‘빠가본드’(Vagabond)이며, 새들과 무연하게 새들은 강원도 횡성의 한 마을을 소리로써 상징했기 때문이다.



  예버덩의 개들은 낯선 이를 보면 무지막지하게 짖어댄다. 필사적으로 짖어대는 개들은 그러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낯선 이를 얼마간 좇아간다. 그래서 짖어대는 소리는 자기 보호를 넘어 상대를 겁박하는 살의가 아니다. 그러기엔 이곳 견공들이 휘젓는 꼬리의 율동이 너무 앙증맞다. 견심(犬心)을 알 수야 없지만 자주 볼 수 없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개들의 ‘무서운 호기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4월에도 눈이 온다는 횡성군 강림면 주천강은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본류마저 곳곳이 얼어 있었으니 합수되는 개울들이야 말해 무엇 하리. 산골을 타고 내려오는 가는 물줄기들은 그 흐르던 모습대로 울퉁불퉁 얼어 있었다. 아직 사방이 황갈색으로 가득한 초봄,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얼음 줄기의 반짝이는 색감은 아주 튼튼하게 잘 생긴 이 마을의 하얀 어금니와 같았다.


  이 얼마나 상식적인 아침인가. 식은 방바닥은 데워야 하고, 물은 끓어야 국도 되고 밥도 되는 것을. 그런 연기는 하늘로 오르고 새들은 부감법으로 먹이를 찾는 것을. 나무는 땅에서 정기를 받아 위로 위로 자라는 것을. 강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높은 왼쪽에서 낮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것을. 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아침인가.



  그렇다면 나는 나의 시신(詩神)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른다. 영접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렇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오직 바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예버덩은 ‘문학의 집’이라기보다 ‘문학을 기다리는 집’에 가깝겠다. 사실 모든 문학의 집은 ‘문학을 기다리는 집’이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시신은 오고 있는가. 가령 바흐(J. S. Bach, 1685-1750)의 「예수, 인간의 소망과 기쁨」(Jesu Joy Of Man's Desiring)은 200여 곡이 넘는 그의 장대한 칸타타의 행렬에 속한 단 한 명의 초병이지만, 오보와 트럼펫과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딛고 선 저 간절한 접신(接神)의 선율은 내 영혼에 신의 자리를 서둘러 마련케 하는 것 같다. 신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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