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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Nov 11. 2020

거미랑 동거하기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32회)

“거미야말로 자신의 운명에 순명하는 진정한 자연주의자”

     

  시인 박성우(1971- )는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 걸으면 걷는 대로 /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라며 거미의 일상적 행태를 곡예와 같은 현대인의 삶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는 또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거미」)며 거미와는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는 곤충생태학적 사실까지 보고했다.



  그러나 횡성군 ‘예버덩문학의집’에 잠시 기숙한 초라한 시인은 아예 목숨을 내놓는 거미를 보며 살았다. 도시에서만 살던 시인은 혐오스런 거미의 여덟 개 다리를 결코 좌시하지 않으며, 거미로 하여 상상되는 곤충의 인간계 잠입을 묵과하지 않았다. ‘목에 줄만 감지 않았지’ 온몸을 던져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그 무모한 자살 행위는 반드시 응징하고자 했다. 빗자루로 내리치고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 그 ‘혐오’를 기어이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 응징을 매일 해야 했다. 책상과 의자와 옷걸이 등 꼭 필요한 세간만 구비된 문인들의 작업 공간, 기능적 필요를 최적화시킨 작은 방에서 거미는 너무 빨리 너무 뚜렷이 포착됐다. 은신처가 없는 인간계에서 거미는 결코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특히 ‘혐오’에 민감한 이 둔각(鈍角)의 시인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러니 거미는 진작 사라졌어야 했다.      



  아, 아니었다. 거미는 매일 나타났다. 내쫓아도 때려잡아도 고이 쓸어 담아 버려도 거미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이처럼 목숨을 거는 거미 군단을 이전에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거미는 예버덩 생활의 전제조건인 양 날마다 눈에 뜨이니 어떤 식으로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와 거미의 동거는 우정이 아니라 분노조절 혹은 혐오 조절에 가까웠다.     


  거미만이 아니다. 이웃집 고양이는 아예 출입문 앞에 앉아 있었다. 이 겁 없는 흰 고양이는 애교 섞인 울음을 울다가 자기 몸을 문에 막 비벼대기도 했다. 인간에게 무시당한 고양이의 관심 촉구 행동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고양이의 행동을 주목하게 되었다. 어디선가 강아지도 나타났다. 이놈은 뒷다리를 구부려 엉덩이를 잔뜩 낮추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아예 대놓고 친분을 과장했다. 언제 봤다고.



  고양이와 개가 인간과의 오랜 친분을 과시하는 것이야 명실상부한 일이지만 거미와 나의 동거는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 혐오스런 갑각체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동거충(同居蟲)이 안타갑기도 하고 애처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극적 운명에 비유되는 ‘거미줄’ 이미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완강한 거부 의사와 처절한 응징에도 끊임없이 ‘자살 행각’을 일삼는 그것들의 무반성적 행동 때문이었다. 어쩌면 거미야말로 자신의 운명에 순명하는 진정한 자연주의자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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