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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Nov 04. 2020

봄눈 속에서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31회)

“꽃샘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쉼 없이 볼 터치를 하는 샛노란 머리칼의 여학생은 예쁘다. 그 옆에서 눈을 치켜뜨고 연신 섀도우 브러시를 움직이는 트렌치코트의 아가씨 또한 예쁘다. 예쁘지 않은데도 예쁘게 보아야 해서 예쁜 게 아니다. 실로 예쁘다.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표현주의와 우호적 생존 환경을 유도하는 어떤 미적 행위도 자연스럽기만 하다.     


  「한국인의 밥상」(KBS)에서도 그랬지만 화장기가 겉도는 쭈글쭈글한 거친 피부의 시골 할머니들은 아름답다. 횡성 만세공원 버스 정류장에 앉아 두세 시간은 거뜬히 농어촌버스를 기다릴 줄 아는 화장기 겉도는 할머니들은 아름답다. 조금이라도 단정하게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 정당한 여성성과 화학제품과 생물학적 피부 사이의 과감한 불일치가 아름답다.     


  한 손으로 장바구니를 부여잡고 한 손으로는 버스 좌석을 잡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주머니는 건강하다. 꽃무늬 목도리와 털모자를 쓴 아기를 안고 그 크기만 한 젖먹이 용품 가방을 든 젊은 엄마도 건강하다. 초봄의 농어촌버스는 네댓 명 건강한 승객을 태우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소리치며 달려간다. 차가 많지 않으니 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하루 서너 번밖에 다니지 않으니 힘이 남아서도 크게 소리친다.


진정한 여성성은 할머니와 여학생과 아주머니와 젊은 엄마들의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 삶에 있다는 것을 횡성과 안흥과 둔내에서  발견했다.


  번드르르한 환경론자들의 절대주의가 얼마든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과 같이 여성성이니 생명력이니 하는 추상화된 이념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환경운동과 여성으로부터 분리된 여성주의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전형적인 타락 양상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진정한 여성성은 할머니와 여학생과 아주머니와 젊은 엄마들의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 삶에 있고, 진정한 생명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고통과 생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휘청거리는 허약한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횡성과 안흥과 둔내에서 발견했다. 그들의 표내지 않는 낱낱의 생활 속에 참다운 생의 에너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편편마다 개성을 담아야 하고, 구절구절마다 고유한 표현을 얻어야 하는 시의 세계를 위해 예버덩문학의집에 입주하기로 한 결정은 옳았다. 그런 터수를 딛고 시집 원고 정리와 시론적 에세이 집필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횡성에 있는 몸이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을 했다. 서울과 나를 연결한 초고속통신망은 보이지 않는 절대 괴물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를 맞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또 다른 구속인가.



  그날 횡성의 최저기온은 영하 6도였다. 뭐 그 정도는 얼마 전까지 한겨울이었으므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4월에도 온다는 그 눈이 좀 휘날린 것도 별 것 아니었다. 소용돌이까지 일으키는 세찬 바람도 까짓 별것 아니었다. 그 어떤 외부적인 것도 내면의 우울과 불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눈을 보고 영화 「러브스토리」(Arthur Hiller 감독, 1970)를 떠올리며 청춘의 열정을 얘기하는 것도 좋았다. 몰아치는 바람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Victor Fleming 감독, 1939)의 클락 게이블과 비비안 리를 연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새봄의 눈과 바람을 긍정적 시그널로 인식하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황무지의 먼지바람 속에서 고개를 파묻고 걷는 것처럼 답답하고 무거운 것인가.


  확실하지 않은 미래나 과거에 대한 관념에서 생기는 ‘불안정한 기쁨’을 희망이라고 한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뜻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안정된 존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그 조건 위에서 기쁨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희망의 상대 개념을 공포로 상정했는지 모른다. 그에게 공포는 ‘불안정한 슬픔’이다(『에티카』(강영계 역), 서광사, 2007). 희망도 공포도 불안정한 데서 비롯된다.


어느 현재주의자의 봄의 기록을 가을에 읽는다는 것은, 그 시차감만큼 동일화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버덩에서 나는 ‘불안정한 기쁨’을 추구했다. 작품 정리와 시론적 에세이 집필이라는 불안정한 작업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했다. 예버덩문학의집은 그런 점에서 물리적 시설이라기보다는 영혼의 격자에 가까웠다. 동일한 공간에서도 영혼의 희망과 공포는 교차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impotentia)을 인식할 때 슬픔에 빠진다. 스스로 짊어진 과제이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결핍된 자신을 수시로 발견하며 그것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다. 이것은 매우 본질적이다. 대체할 수 없는 슬픔이다. 나의 무능은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 무능은 사람을 항상적인 슬픔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자. 대체할 수 없는 바로 그 근본적 무능에 인간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슬프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불안정한 기쁨과 슬픔 속에서 희망과 공포를 누리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인간은 언제나 근심을 쌓아놓고 살지만, 동시에 그 틈새로 희망과 기쁨을 열망하는 존재이다. 힘을 내자. 새봄 꽃샘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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