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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May 10. 2021

에필로그 - 주체의 몰락, 현재주의의 위기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56회)

  에피스테메(Episteme)나 아비투스(habitus)가 만일 우리를 집단성에 맹종하게 만들거나 다수파의 삶에 탐닉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혹은 인간 조건의 보편성과 사고의 인접성에 대한 방대한 지적 성과를 충분히 사숙하지 않은 단순한 추상화에 불과하다면 또한 거부되어야 한다.


  한때는 분화보다 총화가, 다양성보다 총체성이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던 때가 있었다. 대량생산과 박리다매의 수출 전략이 국가경제의 에너지원이 되던 산업화 시대의 기업에는 말할 것도 없고 가난을 면하는 게 절체절명의 생존 과제인 수많은 가정에서도 그러했다.


  정보의 분출이 차별성과 개성으로 연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보 권력에 대한 맹종적 태도를 야기하는 세태 속에서 분화와 다양성에의 요구는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다. 단일성이 아니라 다원성이, 통념이 아니라 개성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가 중요한 시대다. 우리는 누가 ‘우리들’에 더 가까운가를 찾기보다 자신의 고유성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오직 ‘나’를 발견해야 한다.      


  개성적 군상들의 협화음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개별 연주자의 역량이 한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수준 전반을 보장해 주는 기초가 되듯 한 순간도 동일한 존재일 수 없는 각자의 외삽(extrapolation)되지 않는 개체성이야말로 우리 공동체의 참다운 동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누가 ‘우리들’에 더 가까운가를 찾기보다 자신의 고유성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오직 ‘나’를 발견해야 한다.


내 눈으로 세상보기


  신체발부의 주인으로서 나는 내 몸과 정신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모든 과정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생성되는 일체의 변화를 포함하는 당당한 주체다. 그러나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정신으로 판단하며 내 몸으로 행동하는 상식적 생활이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의 물리적 조건이나 다른 주체들과의 이질적인 접면과는 별개로 나는 이미 해석된 정보의 범람 속에서 주체성 상실의 비극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주체를 몰락의 길로 내모는 원인은 멀리 있지 않다. 매일 24시간 공급되는 신문과 방송, 포털 사이트와 SNS 속의 정보는 공급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미 우리 주체성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넘치는 정보의 바다에 거센 지원군으로 등장한 이른바 1인 미디어 시대의 폭주하는 해석들도 우리의 주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정보의 물량과 현란하고 선정적인 수사만이 아니라 근거가 부실한 선동까지 횡행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갈수록 ‘나’의 위치에서 밀려나고 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망과 모바일 서비스 수준을 가지고 있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역설이다. 그것은 ‘내 눈으로 세상보기’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절대 과제로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생산된 정보와 해석된 가치의 뿌리로 돌아가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어떤 사태의 기저로 파고들어가는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자체를 본질로 삼고 그에 핍진하게 육박해 들어가는 고역(苦役)을 마다하지 않는 의지가 긴요하다.      


  정보화 세계의 이른바 ‘파워’ 집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힘’을 얻기 위해 들이는 무시무시한 집중력과 에너지 투입에 상응하는 우리의 주체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더라도 광우병 사태나 천안함 침몰,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사건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수시로 접하게 되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1차 정보에 접근해 자신이 직접 해석하고 판단하겠다는 태도는 드넓은 네트워크 세계를 ‘종횡사해(縱橫四海)’하는 미지칭의 정보 공급자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다시 세우게 할 것이다. 



이른바 1인 미디어 시대의 폭주하는 해석들도 우리의 주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언표이론을 기반으로 한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에피스테메는 담론 형성의 조건에 대한 시대적•사회적•심리적 지평을 선험적으로 추상화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한 시대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엄밀하게 분석한 결과이자 그에 따른 경험론적 분류학(고고학)의 총화에 가깝다. 때문에 그는 ‘어떤 에피스테메가 득세했다고 해서 특정 시대와 문화의 모든 사람들이 그 노선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말과 사물』(이규현 역), 민음사, 2012). 그러므로 일상의 우리가 시시각각 봉착하는 판단 의탁의 비주체적 상황의 단순 총합은 결코 에피스테메가 아니다. 푸코는 개성적 주체들의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세세하게 살핀 끝에 그 기저에 흐르는 바탕을 포착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압력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외부에 대한 신체와 정신의 계루(係累) 혹은 길항(拮抗)이다. 그런 면에서 아비투스는 분석의 결과이기보다 논리적 추론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제반 조건과 유기적으로 조응하고 변형시켜 나가는 필연적인 성향이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본 것은 인간 내면의 구조이자 일종의 집단무의식이었다(『자본주의의 아비투스』(최종철 역), 동문선, 2002). 그런 점에서 아비투스는 개성적 주체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명시적 부정의 대상이지 체념하며 받아들일 용어가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압력에 대응할 때 우리는 일정한 공유점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해석된 정보가 아니라 그 원형질에 다가가 직접 해석하고 판단하는 주체적 행위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주인공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와 아비투스의 생산자로 우뚝 서는 길이기도 하다.     


허상의 주체와 실상의 주체


  가령 주말 종로 통인시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장년과 초로의 시민만이 아니라 이십 대의 새파란 연인들과 한복을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라고 할 때 그 비집단적 집합의 원인은 ‘통인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값싸고 맛있는 도시락이 아니라 오히려 음식 품앗이를 마케팅에 적용한 전통시장의 유명세에 자신을 던지는 비주체적 자기보호 본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주말 통인시장은 더 이상 생필품과 식재료의 유통 창구를 본질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복궁에 인접한 시티투어 코스이거나 전통시장 체험장이거나 청춘들의 다소 특별한 데이트 코스에 가깝다. 또한 다수성에 터 잡으려는 불안한 현대인의 비주체적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 의식을 만족시켜 주는 심리적 기제이다.



내게 이미 속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삶, 그것이 주체적 삶이며 허상의 자아를 실상의 주체로 만들어 주는 길이다.


  어떤 외부적 사태에 대한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주체성 상실이 정보화 시대의 역설적 양상이라면, 실상의 주체가 사라진 비주체적 자아의 원인은 내부적이다. 허상의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벗어나 타자를 향한다. 실상의 ‘나’가 아니라 잠재적인 허상의 ‘나’(타자)를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좋아하는 유명 배우의 옷과 가방과 선글라스를 선망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유명 배우에 연결 짓는다.     


  좋아하는 운동선수, 선호하는 정치인, 신뢰하는 작가, 존경하는 학자의 이미지를 향해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가는 ‘나’는, 그러나 디지털 신호의 단속적인 절연상태(絕連狀態)와 같은 불안정한 영상에 투사된 허상 혹은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만날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나는 허상을 동일시하는 비주체적 ‘나’로 전락하고 만다.


  가령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가 “자아의 참된 대립은 비자아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또한 “‘있음’, 즉 갖기의 참된 대립은 있지-않음이 아니라 가진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주체의 성격에 대한 엄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다(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이찬웅 역), 문학과지성사, 2004, pp.198-199에서 재인용).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무한한 가능성의 술어적 존재이다. 이미 누가 걸어간 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첫걸음을 떼는 그 길을 가는 존재. 내게 이미 속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삶, 그것이 주체적 삶이며 허상의 자아를 실상의 주체로 만들어 주는 길이다.     


  “나의 귀속 범위가 나에게 본질적으로 밝혀주는 것은 역전된, 일시적인 또는 잠정적인 귀속들”이라고 하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소유물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할 때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염두에 둔 것은 물론 모나드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이지만, 그것은 또한 ‘나’도 알 수 없는 나의 어떤 가능성을 실행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나’일 수밖에 없다는 전언이기도 하다.     


  하나의 신체가 나의 모나드에 귀속되는 게 아니라 ‘모나드들이 나의 신체의 부분들에 귀속된다’는 역전, 또 ‘모나드들이 일시적으로 나의 신체에 귀속된다’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가 이미 나의 부분으로 내게 잠정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내’가 다수의 타인이 형성해 놓은 어떤 틀을 맹종하지 않는 한 언제나 새로운 ‘나’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된다. 그리하여 나의 고유한 ‘소유물’을 차츰 늘려가는 가운데 주체적 자아의 ‘명석한 주름(pli)’은 공존하는 우리의 세계를 빛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가는 통인시장은 더 이상 비주체적 자기보호 본능의 플라시보 효과로서가 아니라 나의 참다운 주체성의 표현이 된다. 나는 이제 유명 배우의 옷과 가방과 선글라스와 상관없이 나를 표현하는 ‘실상의 주체’가 된다.

     

참다운 공동체를 위한 주체적 개인


  판단을 의탁하고 행위를 위탁하는 주체 실종의 사회에는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나’가 사라진 ‘우리’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가 아닌 ‘우리’에 빠지는 순간 헤어나기 어려운 집단의 굴레에 갇힌다. 이런 유형의 ‘우리’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 아닐 수 없다. 주체적 개인이 있어야 참다운 공동체가 성립된다.     


  해석의 정당성이나 공적 책임의식보다는 조회 수와 댓글에서 짜릿함을 느끼는 키치적 욕망만이 문제가 아니다. 또한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애써 해석과 판단의 주체가 되기보다 피동적 수용자에 그치고 마는 정보 수용자만을 탓할 수도 없다. 군사독재와 폭압적 권위주의 시대를 벗어나 권력 자체가 다기화(多岐化)된 민주화 이후 생활인들이 겪는 왜소증과 눈치 보기를 함께 지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어떤 전범도 인정하지 않는 자아의 치열한 갱신의 태도야말로 개성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고 이런 조건 위에서 진정한 다양성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사는 오랜 동안 의(意)와 사(辭)의 전장이었다. 의미론과 표현주의 논쟁은 한 시대의 문학적 지평을 정의하는 큰 주제였기 때문에 치열한 쟁론으로 이어졌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궁이공(窮而公)’을 외치며 사륙변려체의 관습화된 복제 문학을 넘어 생동감 있는 작품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당시 흥기하던 사대부 계층의 청신한 개혁 기류를 옹호하여 귀족주의 체제를 벗어나려는 문학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이들의 고문 운동은 당나라 때 비롯되어 거금 400여 년 동안 지속된 치열한 논쟁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에게는 살불살조의 정신이 요구된다. 그 어떤 전범도 인정하지 않는 자아의 치열한 갱신의 태도야말로 개성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고 이런 조건 위에서 진정한 다양성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다원주의는 주체의 공존이지 몰개성의 다기성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 개인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전제가 아닐 수 없다.      


  참다운 공동체의 조건이 우리 각자의 주체성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영광의 터전을 위해 허상이 아닌 실상에 전착하며 이념이 아닌 실질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주체적 다원성이 민주주의의 근거가 되고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다시 미래를 개척하는 ‘영원회귀’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언제나 당당한 주체들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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