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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Nov 30. 2021

김종삼의 시 네 편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 (16)


"비극적 현실에 대한 애탄과 위로의 시"



 시집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에 게재된 「殘像의 美學 - 김종삼의 시세계」에서 시인 황동규는 “김종삼의 시는 반성을 거부한다.”면서 “30년 가까이 우리 곁에 있어 왔으면서도 그의 작품이 주는 이해와 감동이 그만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을 극도로 삼가는 그의 성격”과 “그보다도 그의 시가 여백의 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김종삼의 세계는 시적 분신이 단독으로 연출하는 ‘판토마임’이며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요컨대 개인사에 대해 밝히기를 극도로 꺼리는 김종삼의 성품이 작품 표현에도 영향을 주어 ‘문장의 맥락이 흐트러질’ 정도의 불완전한 종결어미나 과감한 생략법이 구사되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북치는 소년」에서 ‘~처럼’으로 끝나는 3개의 연 모두 직유의 대상이 생략되어 있다. 원관념이 생략된 때문에 문장은 완결되지 못했지만, 시적 정서는 오히려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전문     


 같은 글에서 황동규는 ‘~처럼’ 뒤에 ‘북치는 소년’을 덧붙이면 전체 맥락이 살아난다면서, “그는 지금 서양 소년이 북치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소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북치는 소년’이라는 비교 대상(원관념)이 생략됨으로써 ‘내용 없는’이라는 표현과 매우 ‘절실히 어울리는 틀’을 만들었다고도 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북치는 소년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북치는 소년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     


 황동규의 의견을 따라 이처럼 ‘북치는 소년’을 각 연에 추가할 때 이 작품의 생략에 의한 여백미가 시적 정서의 확장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알 수 있다. 각 연에서 ‘북치는 소년’은 어감의 단순 반복에 그치고 있으며, 의미의 변주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시를 매우 단조롭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생략된 원관념을 ‘북치는 소년’이라고 단정한 황동규의 언급은 작품의 시적 의미를 축소하고 약화시키는 해석이 된다.


 ‘북치는 소년’이 작품의 표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각 연에서 ‘~처럼’ 다음에 생략된 원관념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때 오히려 시적 정서와 울림은 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1연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을 ‘실속도 없이 아름답기만 한’ 무엇으로 하고, 2연 전체를 ‘실속 없는’을 구체화하는 이미지로서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에서 온 아름답기만 한 크리스마스카드’로 풀이하고, 3연을 ‘카드’에 담긴 어떤 그림으로써 ‘양떼 위에 날리는 진눈깨비 그림’이라고 해도 큰 오독은 아닐 것이다.


 체코의 전통 민요에서 비롯되었다는 크리스마스 캐럴 「북치는 소년」(Little Drummer Boy)의 리듬감을 연상하며 읽는 것도 이 작품을 다르게 향수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The song was originally titled “Carol of the Drum” and was published by the American classical music composer and teacher Katherine Kennicott Davis in 1941 based upon a traditional Czech song.)


 ‘노래하자, 파 라파팜팜’을 기본 리듬으로 반복되는 캐럴송 「북치는 소년」의 느낌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의 무한 반복되는 멜로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김종삼의 개인사는 이 작품을 그림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해석하는 게 유력하다고 말해 준다.


 김종삼은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학생이었으며, 도쿄 유학 시절 고전음악만을 틀어주는 ‘르네상스 다방’의 단골이었고, 6.25 전쟁 때 피난지 부산에서도 ‘돌체’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방송사에서 꽤 오랫동안 음악효과를 담당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자 전문가이기도 했다.


 김종삼은 1963년 2월에 동아방송 총무국에 촉탁으로 입사했다가 1967년 일반사원이 되어 제작국으로 옮겼다. 그 이후 그는 10여 년간을 동아방송에서 음악효과를 맡으면서 1976년 정년으로 동아방송을 나올 때까지 원 없이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뒤 자정 너머부터 혼자 음악을 들었다.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 2009)


 이제 캐럴송 「북치는 소년」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산문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화면 안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아든 가난한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카드 속에는 어린 양을 품에 안은 목자(예수)가 있고, 그와 함께 그를 둘러싼 양떼들이 비탈에서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구세주의 탄생(성탄절)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소년이 처한 현실은 그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의 아름다움은 ‘내용이 없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시각 이미지로 형상화된 예수는 대개 서양인의 얼굴이며, 양떼 역시 한국적이기보다 서구적이다. 크리스마스를 구세주의 탄생으로 축하하고, 캐럴송을 부르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카드에 담아 주고받는 풍습도 근본적으로 서구에서 기원한다. 카드에 그려진 대로 예수는 여전히 구세주이지만 이 가난한 소년에게는 너무 멀리 있는 존재이고, 구세주의 품에 안긴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도 너무 멀리 있는 빛이다.


 그러므로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은 한 ‘가난한 아이’가 처한 세계와 구원의 불일치에서 오는 비극적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된다. 구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소년의 이미지를 언어적 생략과 절제로 담아내 비장미를 보여주고 있다.


사면은 잡초만 우거진 무인지경이다

자그마한 판자집 안에선 어린 코끼리가

옆으로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자세히 보았다

15년 전에 죽은 반가운 동생이다

더 자라고 둬 두자

먹을 게 없을까     

- 「虛空」 전문


 「虛空」에는 이미 15년 전에 죽은 동생이 등장한다. ‘어린 코끼리’로 표현된 죽은 동생 역시 「북치는 소년」의 ‘가난한 아이’처럼 구원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마지막 행 “먹을 게 없을까”에서 보듯 동생은 아직 ‘코끼리’로 불리던 어린 나이에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기서 ‘코끼리’란 부모나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흔히 붙이는 애칭의 일종으로 보인다. ‘강아지’나 ‘송아지’, ‘돼지’, ‘곰’ 등 동물에 빗대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마음이다.


 ‘어린 코끼리’가 옆으로 누운 채 곤히 잠든 곳은 판잣집이다. 그 집의 사면은 잡초만이 우거져 있고 사람이 오가지도 않는다. 여기서 ‘판자집’은 ‘어린 코끼리’가 살았던 실제의 판잣집이라기보다 아이가 묻힌 관(棺)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작품 제목이 말하듯 ‘어린 코끼리’가 잠든 관은 아늑한 실내가 아니라 ‘허공’에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지금, 오가며 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 어느 애기 무덤을 보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값싼 판자로 만든 관에 든 한 어린이의 시신을 떠올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1~3행까지 시는 ‘어린 코끼리’가 잠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다가 4행 “자세히 보았다”이후에는 그를 “15년 전에 죽은 반가운 동생”으로 바꾼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애기 무덤 속 주인공은 가난과 배고픔 속에 죽은 자신의 동생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다. 무연한 타인의 죽음이 일순간 자신의 일로 전환되는 순간이자 개인의 죽음이 공동체적 현실로 인식되는 순간이다.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여기서 어린 동생의 때 이른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것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고 있다.     


갈 곳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비 한 마리가 맞은편으로 어기적뻐기적 기어가고 있었다 연신 엉덩이를 들석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차량들은 적당한 시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없는 차량 밑을 무사 돌파해가고 있으므로 재미있게 보였다     

......     

대형 연탄차 바퀴에 깔리는 순간의 확산 소리가 아스팔트길을 진동시켰다 비는 더욱 쏟아지고 있었다

무교동에 가서 소주 한 잔과 설농탕이 먹고 싶었다     

- 「두꺼비의 轢死」 전문     


 이 작품에는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대형 연탄차에 갈려 죽은 두꺼비가 등장한다(‘轢死’는 차에 치여 죽음을 뜻한다.). 두꺼비는 ‘수없는 차량’들이 ‘적당한 시속으로 달리는’ 도시에 있을 존재가 아닌데, 하필이면 비 오는 날 ‘엉덩이를 들석거리며’ 대로를 기어가다 그만 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화자는 그 죽음의 장면을 버스를 기다리다 보게 되었고, 두꺼비가 바퀴에 깔리는 순간의 ‘확산 소리’를 못 견뎌 무교동에 가서 소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화자의 심사는 두꺼비의 비극적 죽음에 투사된다. (1)고속으로 전개되는 도시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느린 행동, (2)무모하게도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를 기어가는 행동, (3)마침내 대형 연탄차에 깔려 죽음을 맞은 두꺼비. 이를 대도시 서민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속성에 투사해 본다면, (ㄱ)도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인, (ㄴ)세속적 가치와 다른 길을 걸어가는 시인, (ㄷ)마침내 패배한 생활인의 신세로 전락한 시인 등의 유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두꺼비의 죽음’은 한 미물의 죽음이 아니라 ‘시인’ 혹은 ‘시인과 같은 존재들’의 죽음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무교동에 가서 소주 한 잔과 설농탕이 먹고 싶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어느 동물의 죽음을 인간의 특정한 국면과 유비하는 작품은 종종 만날 수 있다. 가령 김광규의 「어린 게의 죽음」은,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전문(『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몸집이 작아 구럭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어린 게가 오히려 아스팔트길에서 군용 트럭에 깔려 터져 죽는다는 내용이다. 어미를 따라 어부에게 잡힌 것도 구속이지만, 어린 게의 탈출이란 것도 사실은 목숨까지 앗아가는 일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바다의 자유’와 달리 어린 게는 ‘이중의 구속’에 갇힌 존재라는 발상이다.


 또 안주철의 「흉측한 길」에는 차에 치여 납작하게 터져 죽은 ‘흰 개’가 “길을 /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침부터 그 흰 개는 길을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

길 옆 화단에서 잡초와 시간을

뽑고 있는 노인들은

잠깐씩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아카시아 꽃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먼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떨어지기 전

향기를 잃은 꽃잎으로

쉽게 남들의 일이 되는 법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럭이 그 흰 개를 밟고 지나갈 때

그 흰 개는 털을 세우고

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시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를 통해 그 흰 개를 확인하는 운전사     

거울에 비친 죽음은

거울에 맺힌 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 안주철, 「흉측한 길」 부분(『창작과비평』(2002년 겨울호, 통권 제118호), 창비, 2002)   

  

 이 작품은 자동차로 상징되는 인간 문명과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동물의 처참한 주검을 통해 모든 부적응이나 부조화로 비유된다는 점에서 김종삼의 「두꺼비의 轢死」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안주철의 표현대로 문명사회의 “거울에 비친 죽음은 / 거울에 맺힌 상보다 /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 「민간인」 전문     


 이 작품은 모두 2연 7행의 짧은 분량이다. 1연은 작품의 연장을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을, 2연은 영아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과 그에 대한 짧은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7년은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남북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통치되던 군정기이다. 사실상 분단 상태였던 해주 (1)용당포 앞바다에서 한 영아가 울음을 터뜨렸고, (2)놀란 승선자들은 황급히 아이를 달래느라 일대 혼란에 빠졌고, (3)그 통에 아이는 물에 빠졌고, (4)그렇게 아이를 삼킨 ‘그 수심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 작품 역시 김종삼 특유의 생략과 절제에 의한 메마르고 건조한 기록 속에서 水深과 獸心과 愁心의 다층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창작자인 김종삼의 생몰연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실 「북치는 소년」이나 「虛空」, 「두꺼비의 轢死」는 모두 최근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는데 비해 이 작품은 그 언어 감각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1947년 봄’이라고 명확히 기록함으로써 작품의 시간적 한계선을 분명히 하였다. 또 「북치는 소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이 등장하는데 「虛空」의 죽음이 가난에 의한 것으로, 「두꺼비의 轢死」가 인간 문명에 의한 사회적 죽음이라면, 「민간인」에서 영아의 죽음은 이념과 체제에 의한 타살이다.


 통행증 없이 38선을 넘나들 수 없었던 군정기에 허가 받지 못한 월경의 순간 돌발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아는 피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영아의 억울한 죽음은 잊히지도 않고 그 슬픔은 잦아들지도 않는다.


 이처럼 김종삼의 작품은 모두 생략과 절제를 언어적 특징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품마다 숨겨진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그것은 가난과 죽음이라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애탄과 위로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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