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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Nov 20. 2021

박용래의 「모과차」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15)

    


   앞산에 가을 비

   뒷산에 가을 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밤

   모과차 마시면

   가을 빗소리    


- 박용래(1925-1980), 「모과차」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지금 모과차를 마시고 있다. 계절은 가을, 때는 밤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오는 모양이다. 낯선 마을 지형지세도 서툰데 ‘기인’ 한밤에도 빗소리만으로 앞뒤 산을 분별할 수 있으려면 어지간히 많이 내리는 가을비로 추정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작품의 공간적 양상은, 쏟아지는 가을비 속 어느 낯선 마을 허름한 집에서 모과차를 마시는 어떤 사람이 있는 방이다. 시간적 배경은 아주 깊고 캄캄한 한밤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낯선 마을에 와 있는가.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왜 남의 고장에 왔으며, 왜 한밤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가.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에서 일을 생각하며, “이렇다 할 일 없고”라는 탄식조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화자는 알 수 없는 모종의 사정으로 낯선 곳에 왔고, 그 일로 하여 밤늦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기인 밤’을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와 같이 ‘늦은 밤’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밤’으로 해석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떤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밤은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주관적이다. ‘늦은 밤’의 모과차가 지루한 시간을 달래는 시적 화자의 쓸쓸한 심사를 위로하는 장치라면, ‘기다리는 밤’의 모과차는 절박한 기다림 끝에 타는 목젖을 적시는 실효적인 약품에 가까워진다. ‘기인 밤’의 해석은 「모과차」의 의미 구조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쓸쓸함과 간절함이라는 심사를 대비해 ‘기인 밤’을 추정해 본다면 아무래도 그것은 전자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간절한 기다림 때문이었다면 안절부절 못하는 정신의 불안정한 표정이 어디에서든 드러났어야 한다. 이 시 총 8행에 담긴 의미 구조로만 본다면 역시 홀로 떨어진 자의 어떤 쓸쓸한 심사에 가까워 보인다. 시인 박용래는 충남 당진 송악중학교 교사였고, 이 시절에 그는 대전에 살던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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