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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Jan 09. 2022

최영철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20)


너나 가져라



너무 오래 사용해 찰기 없는 영혼

밤사이 다 잃고

앞은 엉망이지만

뒷모습이 쓸 만한

육체가 남았다

어이, 하고 불러보라

목마른 눈길로 돌아보는

내 영혼은 줄이 다 풀어진 악기

입에만 대보고 뱉은 껍질 벗기면

달디단 속 떠오를 것이니

너무 오래 보채기만 한 내 가슴

너나 가져라

생각에 골몰한 어깨

흐릿한 그림자

그 사이 남은 짧은 발가락,

먼 유혹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 최영철(1956-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시네마 천국」 전문         

      


  이 시를 읽으며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Leaving Las Vegas>(1995년)를 떠올렸다면 그 사람은 지금쯤 적어도 사십은 넘은 나이일 것이고, 또 정서적으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길 즐겨하는 섬세한 성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에게 한 가지 더욱 명확한 것은, 이 시는 영화의 전개를 예민하게 따라가면서 주인공 샌더스의 무너져 가는 삶과 절망적 심사에 공감한 시인의 반응물이라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영화의 샌더스를 완전히 자기화한 데 있다. 스크린 속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내 영혼은 이제 아무런 찰기가 없어’, ‘그저 쓸 만한 뒷모습밖에 없지’라는 발언은 절망 끝에 선 한 인간의 절박한 토로임을 느낀다. 그러므로 “너나 가져라” 하고 외치는 포효(咆哮)는 자신의 전인격을 내던질 수밖에 없는 한 실패한 인생의 최후진술이 된다.     


  눈에 보이는 황폐한 삶의 양상에 대한 공감을 넘어, 그런 삶이 바로 나의 인생이며 뗄 수 없는 지긋지긋한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절규함으로써 16행의 이 짧은 시는 111분짜리 장편 영화에 필적하거나 넘어선다.     


  또한 놀라운 점은 이 시에 담긴 영상을 남의 일로 취급할 수 없는 많은 우리에게,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생의 의지를 북돋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너나 가져라” 하고 외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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