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1912-1996), 「국수」 전문
우리 마을의 겨울도 유난히 길고 추웠다. 한번 눈이 내리면 어린 내가 뒹굴고 놀 수 없는 높이와 깊이와 넓이로 일순간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최승호)과 같이 되었다. 그런 때면 삼촌들은 토끼를 잡으러 가거나 잠든 개구리를 깨우러 가고, 나는 어머니 몰래 감자와 옥수수와 콩을 아궁이에 넣어 구워 먹고는 했다.
가끔은 혈기를 못 참고 읍내로 갔던 젊은 아재들이 술에 취해 철교를 건너다 열차에 치여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그런 날에는 온 마을에 원귀가 돌아다닌다며 어린것들은 일찍 잠이나 자라고 할아버지는 호통을 치시고는 했다. 그 옆에서 할머니는 조용히 화로께로 밀어 앉히며 가래떡을 구워 주시고는 했다.
그러므로 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눈 내린 이 조용한 마을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하룻밤 뽀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오는 이것은 무엇인가.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졌다는 옛적 큰마니랑 재채기를 하면 산 너머 마을까지 들렸다는 큰 아바지가 오시는 것 같이 오는 이것은 국수인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고춧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 고기를 좋아하고 삿방 쩔쩔 끓는 아랫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이 반가운 것은 국수인가.
백석의 <국수>를 읽는 방법이야 여럿이겠지만, 알듯 모를 듯 낯선 북방 언어와 그 언어를 노련한 이야기꾼의 구술처럼 풀어내는 텁텁한 말 재미를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또한 눈 내린 이 조용한 마을 의젓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껴안고 어루만져 주는 품의 공시성과 큰마니 큰 아바지로부터 대를 이어 전해진 내력의 통시성이 주는 뜨끈뜨끈한 동질감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배 앞에는 왕사발, 그 어린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이것은 국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