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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19. 2021

정지용의 「예장」과 「호랑나비」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18)


 "죽음을 기록하는 서로 다른 방식"



  「예장」(禮裝)과 「호랑나비」는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장」에는 ‘모오닝코오트’에 예장을 갖춘 한 장년 신사의 자살이, 「호랑나비」에는 화가와 과부의 정사(情死)가 다루어졌다. 같은 지면에 발표된 「도굴」도 무장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늙은 심마니를 다룬 점에서 닮았으나, 그들의 죽음은 모두 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다만 세 작품 모두 실제 ‘사회면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예장」의 장년 신사는 말 그대로 자살을 앞두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예장을 입었다. 예장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의를 다한 복장’이라는 뜻에서 정장으로 보아야 할지, 군 장교들이 입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의전 복장으로서의 예복으로 보아야 할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 후자가 유력해 보인다. 우선 코트와 와이셔츠, 넥타이를 포함한 일체의 복색을 ‘겹겹이’ 갖추어 입은 점, 또 “주검다운 儀式을 갖추어 三冬내- 俯伏하였다”는 표현을 볼 때 엄숙한 의전적 복장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모오닝코오트에 예장(禮裝)을 가추고  대만물상에 들어간 한 장년신사가 있었다  구만물 우에서 알로 나려뛰었다  웃저고리는 나려가다가 중간 솔가지에 걸리여 벗겨진채  와이셔츠 바람에 넥타이가 다칠세라 납족이 업드렸다  한겨울 내- 흰손바닥 같은 눈이 나려와 덮어 주곤 주곤 하였다  壯年이 생각하기를 “솜도 아이에 쉬지 않어야 춥지 않으리라”고  주검다운 의식을 가추어 삼동내- 부복하였다  눈도 희기가 겹겹이 예장같이  봄이 짙어서 사라지다

- 정지용, 「예장」 전문     


  금강산 만물상(萬物相)을 무대로 한 장년 신사의 자살 이야기에 대해서는 소재가 된 기사를 찾을 수 없어 그 사연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어떤 의식을 치르듯 엄숙하고 비장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시인이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기 위해 ‘예장’(禮裝)을 제목으로 삼은 것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넥타이가 다칠세라 납족이 업드렸다”고 함으로써 시신의 외양만 아니라 망자가 생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도한 의식적 태도를 표현했다. 장년 신사는 죽어서도 ‘넥타이’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이다.


  깊은 산중에서 자살한 신사의 시체는 한겨울 내내 발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1)“흰손바닥 같은 눈이 나려와 덮어 주곤 주곤 하였다”는 표현과 (2)“주검다운 儀式을 가추어 三冬내- 俯伏하였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육신은 겨울 동안 눈송이 아래 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장」의 결말부를 처리하는 “눈도 희기가 겹겹이 禮裝같이  봄이 짙어서 사라지다”라는 정지용의 표현이 돋보인다. 그것은 겹겹이 쌓여 겨우내 녹지 않던 눈이 봄이 깊어져 사라지듯이 ‘의식을 갖추어 부복’하였던 장년 신사의 주검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그것은 예장(禮裝)을 하고 죽은 신사를 한겨울 눈이 내려 예장(禮葬)해 주었다는 비유가 된다.


  「예장」에서 죽음의 표현은 대체로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하는 가운데 시인이 선택한 장면(scene)을 통해 시적 의미가 형성된다. 구만물(舊萬物) 위에서 추락하는 육신의 나풀거리는 모습은 중간 솔가지에 걸린 ‘웃저고리’로 상상할 수 있고, 바닥에 떨어진 시신의 모습은 “넥타이가 다칠세라 납족이 업드렸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겨우내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모습은 ‘부복하였다’를 통해, 봄이 되어 차츰 육탈되는 모습은 ‘겹겹이 예장같이’ 사라진다는 표현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장」은 하나의 의식으로 죽음을 대하는 장년 신사의 태도와 이에 주목해 제목으로 삼은 시인의 교감에 의해 한 편의 시적 의미가 형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와 과부의 사랑이 죽음으로 귀결된 사건을 소재로 한 「호랑나비」는 죽음의 표현에서 「예장」보다 훨씬 비유적이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직접적으로 죽음을 지시하는 시어가 없다. 그들의 죽음은 ‘묘연하다’, ‘닫혔다’, ‘열리지 않았다’,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었다’, ‘호랑나비 쌍을 지어 청산을 날고’ 등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특히 ‘호랑나비’가 쌍을 지어 청산을 넘는다는 표현은 이승에서 완성되지 못한 연인들의 사랑이 죽음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화구를 메고 山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충이 이울고  봉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 우에 매점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었다  대폭 캔바스 우에는 목화송이 같은 한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ㅅ신이 나란히 노힌채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하카다(博多) 태생 수수한 과부 흰얼골이사  회양 고성 사람들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 바깥 주인 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븨 쌍을 지여 훨 훨 청산을 넘고

- 정지용, 「호랑나비」 전문     


  「호랑나비」는 또 ‘화구를 메고 산을 첩첩 들어간’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시 후반부에 매점 주인인 과부의 ‘바깥 主人’이 됐다는 표현이 있어 그가 남성인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름과 나이와 출신과 그를 특징하는 제반 정보는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흰 얼골’의 과부를 사랑한 화가일 뿐이다. 첩첩 산중 인근 지역 명칭인  ‘회양’, ‘고성’ 등의 단어가 있어 화가가 들어간 산이 금강산임은 명백하나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의미 맥락에 따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화구를 맨 화가는 첩첩 산중으로 들어간 뒤 종적이 묘연하다, (2)영(嶺) 위에 지은 매점은 덧문과 속문을 닫은 채 겨우내 열리지 않았다, (3)매점에 내린 눈은 봄이 짙도록 처마 높이로 쌓여 있다, (4)움직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거대한 캔버스와 같은 산중에 흰 구름이 미끄러지고 폭포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이 되돌아오는데도 구두와 ‘안ㅅ신’만 가만히 놓여 있다, (5)그런데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한다, (6)그런 사실은 석간 신문을 통해 집집마다 알려진다, (7)하카다(博多) 태생이라는 과부의 얼굴은 인근 주민들에게 익숙했지만, (8)화가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9)이들은 송화 가루 날리고 고사리가 꼬부라지는 늦봄이나 초여름쯤 이승에 자신들의 육신을 모두 부려놓고 호랑나비처럼 쌍을 지어 청산을 넘어간다.


  확실히 「호랑나비」의 죽음은 「예장」의 그것에 비해 비유적이고 추리적이다. 「호랑나비」에서 시간의 변화와 죽음의 양상을 전하는 것은 비유적이고, 화가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익명화한 것은 추리적이다. 때문에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두 연인의 주검을 표현한 시구는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비린내는 또한 동반 자살[情死]로 추정되는 이 사건을 보도한 석간을 통해 집집마다 전달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호랑나비」가 연인들의 동반 죽음을 그린 데 반해 「예장」이 한 사내의 고립적 죽음을 묘사하고 있는 점도 서로 다르다.


  모두 죽음을 다룬 「예장」과 「호랑나비」의 가장 주목되는 차이는 두 작품의 결말부에 나타난다. 「예장」의 장년 신사는 떠나고 싶은 이승을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다가 “봄이 짙어서”야 영구적인 이별(사라짐)에 도달했다. 「호랑나비」의 연인들은 “쌍을 지여 훨 훨 靑山을 넘”음으로써 이승에서의 불완전한 사랑을 넘어 어떤 완전성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그러나 영구적인 이별이든 완전성을 향한 초극이든 죽음을 통해서야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공히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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