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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Jun 25. 2021

햄스터

어느 날 밤에 나는 네가 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녀석은 밤마다 달린다. 나는 포식자처럼 몸을 낮추고 멀찌감치서 지켜보는 중이다. 준비는 길다. 입으로 배와 옆구리, 등과 엉덩이 부근까지 차례로 털을 다듬고, 양 발에 침을 발라 세수하듯 얼굴과 입, 귀를 정성스럽게 씻어낸다. 볼주머니에 저장한 알곡 몇 개를 꺼내 씹는 것도 절차 중 하나. 모든 것을 마치면 몸을 앞으로 길게 빼고 뒷다리를 차례로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쳇바퀴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은 도움닫기, 코코넛 하우스와 터널을 지나 나무 그루터기를 구름판으로 삼는다. 구름판에서 속도를 더하고 바퀴 절반까지 뛰어올라 아래로 끌어내리면 질주가 시작된다. 달릴 때는 온몸을 일자로 곧게 펴서 몸통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머리는 어깨쪽으로 바싹 당긴다. 다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다. 회전하는 속도에 맞춰 발빠르기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다리가 느려지면 쳇바퀴 뒤쪽으로 딸려올라가 미끄러지거나 튕겨나가기 때문이다. 4개월이 막 지난 이 녀석은 어릴 때부터 쳇바퀴에 올라 수백 번을 미끄러지고 떨어지며 알맞은 타이밍을 찾아냈다. 아니 찾아가는 중이다.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 사이다. 이름은 가을이라고 지은 이유다. 부모는 마트에서 사온 두 마리의 햄스터로 태어난 지 4주가 된 녀석은 검지손가락 두 마디 크기에 작고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낯선 손에 잡혀 이동장에 옮겨진 햄스터는 인간과 함께 택시에 오르고 밤거리를 달려 아파트숲으로 들어섰다. 가끔 고개를 내밀어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밤거리를 바라보기도 했다. 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단독 생활을 하는 햄스터는 이별에 익숙한 유전자를 지녔을 것이다. 어제와 내일보다는 오늘에 집중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녀석은 잘 먹고 잘 놀고 잘 잤다. 낯선 손가락이 두려워 종종 깨물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횟수는 점차 줄었고 밤이 되면 꺼내달라고 조르는 수준에 다다랐다. 인간의 너른 허벅지에 안착해 맛 좋은 간식을 얻고 다시 손바닥에 올라 거실로 이동하면 어둠 속에서 곳곳을 탐험했다. 냉장고 밑과 가구 뒤의 구석은 햄스터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먹이를 먹거나 털을 고르고 오줌으로 영역을 표시하거나 똥을 누기도 했다. 어느 지점을 달릴 때면 푸르르 몸을 떠는데 좋아서인지 무서운 건지 이유는 잘 알지 못한다.


십여분 간 달리고 멈추고 떨어지고 달리기를 반복하면 느긋한 휴식 시간이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열오른 털은 후끈하다. 모래에 몸을 몇 번 구르고 스테인리스 그릇에 바짝 붙어 몸을 식힌다. 그러다 한숨 잠들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문앞으로 와 위를 보며 폴짝폴짝 뛰기도 한다. 햄스터는 시력이 좋지 않아 냄새와 소리로 상황을 판단한다. 아닌척했지만 녀석은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다. 


30g의 작은 햄스터는 밤마다 거인처럼 달린다. 칠흙 같은 어둠 속 검은 두 눈동자에 달빛을 머금고 사막을 가로 지르던 시절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대지와 풀잎 향기가 실린 바람을 관통해 내달리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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