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네일을 클릭하자 나훈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부르는 마음이 어색하고 빠른 비트 위에 얹혔다. 왕거미 집 짓는 고개와, 부엉이 우는 산골에 나를 두고 가신 님과, 두만강 푸른 물에 노를 젓는 뱃사공과, 목포의 진한 설움이 펼쳐졌다.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긴 메들리 속에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노래를 들었을 아버지가 떠올랐다. 혹은 병상을 잠시 빠져 나와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몰래 마시고 돌아서는 뒷모습 같은 것이.
아버지의 유튜브 아이디를 발견한 건 며칠 전이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필체가 남은 것들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파일에 넣어두었는데 봄맞이 청소를 하려다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알지 못하는 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 몇몇 사이트의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손바닥만한 종이에 빼곡했다. 유튜브 프로필 사진은 암 투병 초기에 촬영한 듯했다. 깡마른 아버지의 얼굴과 갈비뼈가 도드라진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감정을 읽기 힘든 얼굴을 한참 들여다 봤다. 지쳤을까, 분노했을까, 상심하거나 절망에 빠졌을까.
아버지의 첫 번째 유튜브 시청 기록은 2014년 10월 11일, 나훈아의 카바레 메들리였다. 그해 가을에 대한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나는 좁은 골목 맨끝의 낡은 빌라에 살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분당에서 한남동으로 이사를 한다고 했을 때 큰아버지는 "네 아버지는 어쩌라고 서울로 이사를 가?"라며 원망했다. 부모님이 언제든 오면 며칠 머물 수 있는 방 두 칸 짜리 집이라고 재빨리 변명했다. 골목만 빠져나가면 큰 병원이 있어서 더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달리 아버지가 찾아와 머무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지쳐갔다. 중환자실로 뛰어가는 날이 두려웠고, 입퇴원을 반복하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싫었다. 재활용 쓰레기에 무수하게 담긴 술병은 아버지의 고뇌였지만 나에겐 몹쓸 습관이었다. 나는 말수가 줄었고 웃음이 사라졌다. 대화 대신 침묵을 택하는 날이 늘었다. 바로 그 즈음. 문 한 번 열어보지 않는 딸을 두고 아버지는 유튜브에 가입하고 노래와 불경을 듣거나 금연하는 법, 소자본 창업, 제5공화국 같은 것을 찾아보았던 거다. 살아갈 힘과 변화할 용기, 건재하다는 증명 같은 것들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유튜브 시청은 2019년 4월 톰 존스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으로 끝을 맺는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떠올리는 푸른 잔디가 펼쳐진 평화로운 고향집. 부모님이 나를 반기고 따스한 첫사랑의 기억이 남은 곳. 아버지는 잠시나마 편히 쉴 수 있는 따스한 집이 그리웠을 것이다. 이해보다 성냄이 많았던 딸이라도 괜찮다면 내가 거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