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II

헤어짐을 준비한다.

by 지드

만나고 헤어짐이란 것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흔한 일이겠지만, 만남 한켠에 난생 처음 느껴보았던 강렬함과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한 애뜻한 속앓이가 있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다림 때문이라도 헤어짐의 날을 자꾸만 밀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측하지 못하던 헤어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가슴을 옥죄게 하고 몇날이 지나도 내 눈에서 내 삶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같습니다.


느릿하던 시간들이 그날을 향해 너무도 빨리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녀는 오늘도 떠날 것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을 정리하고 컴퓨터파일들을 정리하고 손때가 묻은 것들이 혹여라도 빠져서 미련이 남을까 미리미리 챙겨둡니다.


가슴이 비어버린 것처럼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옵니다. 마치 온갖 장기들이 한 순간에 없어진 것 같고 그 텅빈 육체를 쇳덩이 같은 시간이 묵직하게 눌러 자칫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순간순간 눈가에 느껴지는 눈물이 압박을 못이겨 몸밖으로 밀려나오는 체액처럼 느껴집니다.


오지 않았으면 했던 그날이 왔습니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순간 가슴이 턱하고 막혀왔습니다. 지난달 처음 그녀의 이야길 들었던 그날, 그 감당치 못할 체증이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조심스러워져 늘 긴장합니다. 그저 직장동료로서 아끼고 좋아합니다. 난 그녀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어 늘 주려고 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받았고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정의를 생각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배려가 자신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날카로운 말의 흉기가 되어 가슴과 머리에 깊은 생채기를 내어 버렸을 때 그녀는 견딜 수 없는 혼란을 격었고 인간의 잔인함과 질시하는 몽매한 속성에 대하여 처음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 그녀를 보듬고 위로해 주지 못합니다. 묵묵하게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화가 났습니다. 자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들에 대하여는 예전처럼 마음을 숨길 수도 없을 것같습니다. 그들을 쳐다보기도 싫어지고 같이 호흡하고 밥먹는 것까지도 싫어집니다. 앞으로 견뎌갈 시간들이 두려워집니다. 금방 허물어질 것처럼 흔들거립니다. 맘편하게 나 역시 사직서를 던지고 자유롭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도 이젠 함부로 할 만큼 젊지 않습니다. 타협하는 것은 더더욱 싫은데 그래서 가슴은 답답하고 터져버릴 것처럼 울렁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 역시 같은 증상을 격고있나 봅니다. 막상 하려고 했던 것을 하고 보니 지나간 시간에 대하여 말 못할 회한이 남는 것일까요. 그녀를 옥죄고 오해하는 모든 비틀려진 시선들에게 자신은 도리어 검은 눈동자가 흰자위에 녹아 묽어진 것처럼 흐릿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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