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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Feb 01. 2022

영천성당 - 묵은 향기 진한

성당기행 #7

오래된 건축물에서는 묵은 향기가 난다. 오래되어 낡았지만 버리지 않고 그대로 고이 닦아 보존하기에 건축물이 풍기는 깊이와 향기가 다르다. 세상은 낡은 것들을 새것으로 교체하기 바쁘지만 영천성당은 한차례 증축작업을 거쳤을 뿐 대부분 1936년에 지어진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건축물이다. 당시에 지어진 고딕양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 등의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소박한 시골여인네 같은 건물이다.


장식이 거의 없으며 그 흔한 스테인글라스나 샹들리에도 없다. 내외부가 그저 담백하고 간소하다. 1월 중순 오랜만에 맞는 화창한 주말. 하늘엔 붓이 스쳐간 흔적처럼 얇은 구름만 간간히 떠있고 햇살은 따스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영천성당의 밝고 화사한 베이지색 외벽이 너무나 조화롭다. 군데 군데 낡은 티를 내는 곳은 보수하지 않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성당 전면의 아치창은 마치 웃는 모습이다. 석재나 벽돌로 창을 낸 아치창이 아니라 그저 흰색페인트로만 아치를 그리는 듯한 모습은 평면적이지만 오히려 더 미려하다. 중간엔 십자형으로 멋을 내어 소박하게 포인트를 주었다.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지중해의 건축물과 닮아 이국적이다.


영천성당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나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7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천주교 신앙촌이 그 모태다. 영천지역에 여러 공소가 건립되고 신자들이 삼삼오오 신앙을 지키다 일제 강점기에 영천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프루아드보 레이몬드 신부가 스위스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성당 건립 기금 8000 스위스 프랑을 기부받아 성당 신축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1936년 10월 성당을 완공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의 천주교 박해가 심했다는 얘기에 가슴이 숙연해진다. 이 땅의 성당들이 어디서나 그렇듯 신자들의 피와 깊은 신앙심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묵직하게 가슴을 누른다.


이색적인 또하나의 모습은 종탑이 입구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뒷쪽에 있다. 원래는 첨탑모양의 장식으로 여느 성당과 마찬가지로 입구 옆에있는 종탑이었으나 1957년 증축되면서 현재의 사각형 종탑이 만들어졌다. 사각형의 망루같은 탑도 이색적이고 지붕아래 처마끝에 소박하게 치장한 무늬들도 담백하다. 검붉은 색의 지붕이 건축물의 구조와 색깔로 인해 멀리서 보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본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길게 뻗은 공간안에 두줄의 회중석이 시원스럽게 놓여있다. 그리 넓지 않은 제대는 아치형으로 제대에 집중하기 좋은 구조다. 외벽과 마찬가지로 밝은 톤의 벽에 민트색 창이 기분좋은 시각을 만든다. 양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성당안의 내부를 은은하게 비춘다. 창은 사각이다. 위로 들어올릴 수 있는 구조이며 밖이 보이지 않는 질감있는 창이다. 이런 유리창은 투명창보다 안에서 느끼는 빛의 농도가 은은해서 좋다.


천정의 모습이 특이하다. 돔형구조는 아니지만 입체적이다.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몇 않되는 건축적 입체감이다. 천정에서 길게 내려와 메달려 있는 전등은 아마도 예전엔 백열등 같은 것이었겠지만 지금은 3파장 전구가 꼽혀있다. 어색했지만 소켓은 옛것 그대로인듯 오래되어 보인다.


제대 뒤 십자고상과 함께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 조각이 이채롭다. 그림이 아니라 입체적이며 단순하게 표현된 추상적 부조형식이다.  동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예술적 가치로도 뛰어나게 보인다.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이 곳에 가져왔는지 알고 싶지만 검색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14처의 글귀와 오래묵은 나무에 그려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제대 양측에 둥근 아치형에는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이 자리하고 있다. 조각상의 색상이 강렬하고 흔히 보는 형식은 아닌 것같아 보는 눈이 즐겁다. 특히 십사처 그림 밑 설명하는 글귀의 글씨체나 그 글귀가 오래됨을 증명이라도 하듯하니 재미있다. "예수 십자가상에 죽어심이라" 경상도 영천이라 으라는 발음이 어로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옛것이라는 느낌이 더 든다. 마당에 있는 성모상에도 글귀가 있는데 "구령의 모여 우리 구하소서" 라고 씌여 있다. 흰 바탕의 글귀가 70년대 글씨체 같아 정감있다.


영천성당의 감실은 밖에 나와있다. 보통은 제대 뒷쪽 벽에 문을 만들어 놓는데 영천성당은 제대 뒷쪽 한켠에 두었다. 나무상자에 가죽질감이 나는 문, 녹슨 못 세개와 못자욱이 선명하다.


영천본당의 초대 신부인 프루아드보 레이몬드 신부는 스위스 태생으로 25살인 1933년 9월 파리를 떠나 11월3일 대구에 도착 1936년에 영천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의 태생도 신비롭지만 이역만리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작은 땅에서 사제의 삶을 시작한 이방인 신부의 희생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진리가 무었인지 삶을 고스란히 희생해도 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은 성당순례를 다니면서 늘 뇌리에서 따라다니는 말씀이다. 욕심에 얽매여 그것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삶이 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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