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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12. 2016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해 - 윌리 오스발트

쉭쉭 인공호흡기의 거친 음이 중환자실의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타악기 리듬처럼 규칙적으로 울린다. 자의로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기계가 숨을 쉬어주고 있는 것이다. 몸은 살아 있지만 뇌가 죽은 사람들 반대로 뇌는 살아있으나 몸의 대부분이 죽은 사람들. 중환자실은 생명의 경계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늘게 남은 숨을 기계에 맡겨두는 곳이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은 언제나 준비되지 못한 채 대부분 급작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그럴땐  허둥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결국엔 맨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체념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잊혀질 것같은 극심한 통증 앞에서도,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뇌사상태에서도 오로지 죽음의 선택권은 환자자신에게 있은 것이 아니다. 애처러운 눈빛으로 제발 죽여달라고 말해도 알아 듣는 사람이 없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걸죽한 액체는 먹는 것조차 거부할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해버리고 만다. 성인이되고 처음으로 침상에 누어 배설을 한다. 간병인이 아랫도리를 벗겨 갓난 쟁이의 기저귀갈 듯 능숙한 솜씨로 그것을 처리한다. 생식기에 연결된 도뇨관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어떠한 인간적 요의나 배설의 느낌도 없이 방광에서 무심하게 쪼르륵 소리도 없이 흘러 소변백으로 채워진다. 방광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소변백을 비우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밖에 없다. 이걸 배설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막 90세가 된 윌리 오스발트의 아버지는 얼마 전 어지러움으로 두번의 낙상사고를 경험했고 방광의 이상으로 소변줄을 꼿고 살아야 했지만 그나마 건강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면 성공했다고 자부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았고 반대로 후회스런 일들도 많았다. 특히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만큼은 어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이기만 했던 자신의 태도 때문에 서먹한 관계를 가졌던 것을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엔 누구나 겸손해지는가 보다. 


"오늘 아버지는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죠. 인생으로 배가 부르다고. 인생으로 지친 게 아니라, 그만하면 인생을 충분히 맛보았노라고. 인생에 곧 마침표를 찍고 싶다며 하신 말씀이세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아버지가 윌리 오스발트에게 한 말이다. 인생으로 배가 부르다고. 배가 부르다는 것은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90이라는 나이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고백일지는 모르겟지만 과연 죽음 앞에서도 그럴까? 노인이 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이 3대 거짓말 중 하나라는 우스게 소리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예기치 않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멈칫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윌리 오스발트의 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때 죽음의 시기를 온전한 자기 권리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인생을 충분히 맛보았으니 품위있는 죽음으로 생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말한다. 그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치 않다. 그들이 자신의 결정에 공감해주길 바라고 결정이 존중받길 바라며 죽음의 순간에도 함께 해주길 기대했다. 아버지는 인생에 남겨진 마지막 품위를 지키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운명이 자신의 결정을 막으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서 막으려 했다. 계획이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질로 틀어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성격 만큼이나 윌리 오스발트의 아버지는 꼼꼼하게 자신의 죽음을 계획했다. 죽음을 계획하다니 얼마나 멋진일인가. 마치 축제처럼 이벤트처럼. 자기가 죽을 장소를 정해두고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을 미리 자식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몇사람과 한자리에 앉아 담담하게 20분간이나 당부의 말씀을 하고, 오래된 최상의 와인으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는 [죽음의 천사]라는 물약을 마신다. <한스, 그거 굉장히 써요> <아, 괜찮아요. 인생에서 쓴맛은 충분히 보았소> 죽는 순간에도 잊지 않는 유머. 윌터의 아버지는 몇분간 말을 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깊은잠으로. 한 개인의 죽음이 이렇듯 평화로울 수 있을까? 


저자의 나라인 스위스에는 "자유죽음"이라는 제도가 법적으로 허락되고 있는지 모른다. 저자인 윌리 오스발트가 직접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을 고백하고 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용인되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특히 죽음 이후 경찰관, 검사, 의사의 사무적 절차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에 신뢰를 준다. 자유죽음을 자살이라고 번역해도 좋을까? 왠지 서로의 단어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자유죽음"이란 단어는 왠지 주체적으로 적당한 때에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 반면, 자살은 타의 또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막다름에서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외부로부터의 수동적 죽음이란 느낌이 강하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생의 저편에 죽음을 경계로 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앞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의료기기로 연명되는 인간의 생명은 또한 얼마나 그 질적인 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존엄사가 윤리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할때마다 항상 가지게되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윌터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죽음으로 말미암은 어떠한 오해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는 나이든 암환자들이 많다. 그들은 생이 다할 때까지 병원 침상에서 마지막 삶을 살아간다. 죽음이 그들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와서 그들의 마지막 남은 실날같이 가늘어진 삶을 무참히 빼앗아 갈때까지 그들은 무기력하게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1평 남짓한 공간이 먹고 배설하는 유일한 삶의 공간이다.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의료진에게도 그 생명은 너무 안타깝다. 


죽을 날을 미리 정해놓는다면 우리는 죽음앞에서 윌터의 아버지처럼 여유있고 품위있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공포스럽게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할때 포만감에 가득찬 그 삶을 끝내는 시기를 내가 정한다면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기쁜마음으로 친구를 만나고 가족을 만나 지나온 삶을 공유하고, 잘못된 결정과 삶에 대하여 용서를 구한다. 먼거리를 여행할 수는 없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지나온 삶들을 정리하고 내가 정한 죽음을 기다리는 것. 그러할 때 죽음도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죽는 순간을 계획하는 일도 담담해진다. 내가 여기 소파에 앉아있고, 아들은 저쪽에 너는 이쪽에 그리고 예식처럼 순서를 정한다. 그날 해주고 싶은 말들을 A4한장정도로 요약해서 근사하게 그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축사처럼 말한다. 그리고 윌터의 아버지처럼 [죽음의 천사]라는 물약을 전혀 쓰지않게 들이키고는 졸린 사람이 잠드는 것처럼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밖은 때마침 너무도 화창한 봄이다. 윌터가 말한 것처럼 날씨마저 죽기에도 딱 좋은 날이다. 


죽음의 순간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은 미리 준비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채로 고통없이 죽는 것보다도 더 행복할 수 있을 것같다. 그 행복감을 정작 본인은 오래도록 느끼지 못할 터이지만 살아서 남아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헤어지는 아픔이 아마도 덜해지지 않을까 싶어진다. 인생에 포만감을 느낄만한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겟지만 그러한 때가 아마 30년 후쯤이라면 그때 내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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