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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20. 2016

人間의 길을 가다.

실천적 사회학자 장 지글러를 만나다 - 연대의 힘

그날 서미영씨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찍 들어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평소에 말수가 적던 아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자 임성준씨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평범하게 그를 맞았다. 아무것도 특별할 것없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아무 표정이 없는 아내의 눈길이 평소보다 약간 더 길게 남편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약간 겸연쩍어진 임성준씨는 옷을 갈아입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서미영씨는 무심한 걸음걸이로 베란다로 다가가 문을 열고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몸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아 아파트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삶과 죽음사이, 아무리 평소에 자살을 연습했던 사람이라 해도 한순간쯤은 망설일 그 간격을 그녀는 풀쩍 뛰어 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 다른 방이 있었다는 듯이 스스럼 없는 몸짓이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베란다로 나가는 엄마를 빤히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아이들의 눈앞에서 엄마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려버린 것이다. -(공지영 의자놀이 중에서)


위의 글은 소설이 아니다. 10여년전 쌍용자동차 해고자 중 한명인 임성준씨의 아내가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상황을 공지영씨가 자신의 첫 르포르타주인 "의자놀이"에서 썻던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난 너무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지 망설이기 조차했다. 해고노동자 그 자신과 가족을 합해 22명이 해고상황으로 인해 자살 또는 급격한 스트레스로 죽음에 이르렀던 이 전대 미문의 충격적인 사실앞에서 나는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지 혼란 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쌍용차의 노동자이기 이전에 이 땅에서 같이 숨쉬고 살아가는 같은 국민이. 이미 10년이 지난 과거의 일인데도 읽는 내내 가슴을 쥐어 짜고 있었고,  국가의 거대한 폭력앞에서 더오래된 광주가 떠올랐다면  비단 나만 그러했을까? 소년이 온다의 저자 한강도 이 나라엔 아직도 너무 많은 광주가 불타고 있다고 했지 않은가.


“남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성은 내 안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나는 칸트의 인식을 다시 보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다. 우리 각자는 정언적 명령을 지니고 있다. 정언적 명령은 세계적인 시민사회의 원동력이다. 정체성-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다-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일부다. -(인간의 길을 가다-p.349)


2014년 4월16일 갑작스런 속보에 온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수백명이 탄 여객선이 팽목항 앞바다에서 갑자기침몰한 것이다.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의 대부분이 그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오열하는 가족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자연스레 눈물을 훔칠 수 밖에 없었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시신들을 보기 힘들어 결국 고개를 돌려 버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희망인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아이를 가진 부모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은 함께 슬퍼했고 오열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세월호를 탄 학생들의 부모였고 친구이고 동생이며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 공감의 슬픔은 얼마가지 않았다. 사고가 난지 한달도 채지나지 않아 세월호 유가족들을 둘러싼 희생자 보상금 문제가 언론에서 흘러나오고 유가족들을 회유하여 정쟁에 이용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세월호 관련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유병언인지 아닌지 모르는 어떤 변사체를 유병언이라 단정하고는 세월호를 팽목항 인근 46미터 수심밑으로 수장된 것으로 매듭지으려 했다. 세월호의 사고원인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은 시간이라는 망각의 약으로 조용히 덮으려 하고 있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얘기는 이제 부담스런 주제가 되었고 국민 대부분은 내가 그 희생자가 아니기에 조용히 묻혀지길 바랬다.


얼마전 JTBC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세월호를 인양하라"라는 제목으로 2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세월호사건을 돌아봤다. 진행자는 첫 멘트를 이렇게 시작했다. "또 세월호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겟습니다" 세월호를 잊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또 세월호.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미수습자 9명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담담하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 얘기들을 이어나갔다. 누구에게는 종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족들에게 감겨진 매듭은 여전히 풀어지지않은 채 아직도 꼬일데로 꼬여있다. 그래서 또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마치 국가 없는 피난민들처럼 홀로 섬 가운데 서있다. 우리가 늘 기억하고 있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또 다른 세월호가 나를 태우고 바다밑으로 수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저서에서 항상 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거대 기업과 권력화된 국가 앞에서 힘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연약함을 연대의 힘으로 극복하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 맥락에는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다"라는 공감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의식이 본질적으로 인간정신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일부인 그 감정과 힘이 보수적 언론과 국가의 알 수 없는 힘에 굴복되어 좌초되고, 획일화되어 교육되고, 세뇌하여 전혀 다른 목적으로 오도되어 결국 처음의 힘을 잃어 버린다. 국가는 국민이 위험에 처해있거나 그 위험에 이르러 죽게 되었을 때 그러한 위험이 다시 재발되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반성과 구체화된 메뉴얼로 남겨진 국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한다. 또한 그러한 위험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국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더이상 국민을 걱정하고 보호하는 나라가 아니다. 소수의 기업들만을 위한 나라이며 소수만의 이득을 위해 정책을 펴는 국민없는 국가, 국민위에 군림하는 과거의 길로 회귀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시간이 약"이라든지 "터널에 끝이 있듯이 슬픔에도 끝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을 경계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어처구니 없는 참사로 잃은 이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달력속의 시간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터널처럼 분명한 끝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응어리다. (중략) 그렇기에 "이제는 슬픔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어쩌면 격려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잔인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이제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란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정의를 위하여-강남순)


공감으로 연대하는 국민만이 나라를 옳바른 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좌표가 된다. 타자의 슬픔과 고통이 더이상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 발상은 그 슬픔과 고통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무시무시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세월호는 아직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왜 자신이 그 바다밑에서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누어있다. 사실을 밝힐 의지가 있는 것인지 아님 그냥 그데로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21세기 우주로 인간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고작 46m 바다밑에 가라앉아있는 여객선을 2년이 지나도록 인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밖에 단정해버려도 무리가 없을성 싶다.


그리고 우리는 싸드가 한국에 배치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국가는 왜 그렇게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목숨을 걸고 강행하려고 하는지 모르겟다. 성주 군민들은 연일 국가의 일방통행적 결정에 분노하고 있다. 언론은 외부세력이 개입되었다느니, 폭력시위에 엄벌을 처하겠다는 위협으로 성난 군민들을 겁주려 하고있다. 도데체 언제적 언론플레이를 변하지 않은 똑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한심하다. 국민의 수준은 날로 높아가는데 아직도 이런 몇십년전부터 해오던 구태적 행동으로 국민의 생각을 조정할 수있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성주 군민들은 외친다. 사드가 성주에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배치되어 또 다른 냉전의 중심에 서는 것을 반대한다고. 혹 성주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성주군민은 바로 나다. 나는 바로 성주군민이라는 연대의식만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닐 지라도 정신적으로 고립된 성주군민의 목소리가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되길 소망한다. 고립된 또 한번의 광주가 아니길 바란다.


다시 한번 장지글러의 말을 들어보자.


“남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성은 내 안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나는 칸트의 인식을 다시 보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다. 우리 각자는 정언적 명령을 지니고 있다. 정언적 명령은 세계적인 시민사회의 원동력이다. 정체성-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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