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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Feb 21. 2017

중년의 새벽

뫼비우스의 띠

요즘은 새벽 6시가 채 되기 전인데도 뭔가에 홀리듯 일어나게 된다. 시간만 되면 정확하게 흔들어 깨우는 날카로운 알람의 비명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일어나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어쩌면 잠깐 멈춤을 누르고 10분간 더 잘 수 있는 사잇잠의 달콤함을 잊어버린 거나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밤새 금단증상으로 말랐던 머릿속을 한 개비의 담배로 언저리에 남아있던 잠을 쫏는다. 길게 허공으로 내뱉는 달콤한 환각의 꼬리가 졸린 눈을 겨우 붙들고 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또 시작된다. 어제 있었던 그 시간과 비슷한 시간들이 부부의 권태기처럼 메마르게 느껴진다. 죽지 않는 시체마냥 흐느적거리며 또 한번의 하루를 살아야 한다. 똑같은 사람을 봐야 하며,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일어나 시작하는 순간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보일러에 뜨거운 물이 준비되는 동안 양치질을 한다. 언젠가 이빨들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한 뒤로는 양치질조차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양치질 중에 커다란 돌 같은 것이 이빨들 틈에서 달그락거렸다. 떨어져나간 치아의 파편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팥만한 크기로 떨어진 그 파편은 혓바닥위에서 어금니 하나만큼이나 과장되게 느껴졌고, 이로 인해 어금니의 바깥 쪽이 폭탄 맞은 집 모양 반절이나 날아가 있었다. 순간 겁이 더럭 났다. 치아들이 이럭저럭 빠지고 떨어져 아마존 원주민의 얼룩덜룩하면서도 엉성한 치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 젠장 큰일이군. 그러면서도 치과를 찾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돈 때문이겠지. 치과의사는 몇백만원의 수익을 위해 온갖 위험스런 이유를 대가며 호갱처럼 대할 것이다. 아 믿을 만한 치과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양치질을 하면서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이젠 양치질 조차도 조신한 양치질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칫솔의 수명이 길어진다. 반대로 내 수명은 짧아지는가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이곳저곳이 낡고 병들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눈도 침침해지고, 속도 자주 아프다. 걸음걸이는 하루가 다르게 느려지고 얼마 전부터는 혈압이 높아져 혈압약까지 찾아 먹고 있으니 쇠락하는 육체를 고스란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언듯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전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 새벽에 죽음이라니 .여백을 메우는 상심이 새벽을 난데없이 고민스럽게 한다. 새벽부터 진지 해지는 자신을 곁눈질 속의 거울에서 발견하고는 답답한 맘이 된다. 그리고는 이내 그렇듯 시니컬해지는 입꼬리를 내리고 에둘러 세수를 마치고 욕실을 나온다.


언제 일어났는지 아침으로 선식을 준비하시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한심함의 눈초리가 혼자된 늙은 아들의 등을 찌른다. 눈을 마주칠 수 없다. 걸죽한 선식을 물마시듯 급하게 털어넣고서는 바쁜 출근길을 재촉한다. 그리곤 기온을 첵크한다. 계절을 맞추지 못하는 어리숙한 감각이 옷의 두께와 길이를 적절하게 코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기온과 바깥의 기온이 확연하게 차이나 그저 피부를 통해 느끼는 감각으로는 계절을 맞추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바람은 앞섶을 헤집고 들어와 견디기 어려운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럴때면 혼자였던 수년의 겨울이 생각나 서글퍼지기도 한다. 남자는 누군가 외투마저도 챙겨줘야하는 평생 어린아이다. 서둘러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역시나 걸쳐입은 옷의 가짓수는 많치 않았고 날씨는 차가웠다. 젠장 날이 풀린다고 하두만 아직이군. 장갑을 끼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옷을 바꿔입고 나온 탓에 손은 고스란히 맨살로 출근하게 생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5분거리쯤되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아직은 7시전.  2월의 새벽은 어둡다. 해가 길어졌다고 느끼는 것은 퇴근무렵일 뿐이다. 군데군데 방범등이 켜져있고 자외선 멸균등같은 퍼렇고 차가운 햇살이 골목구석구석으로 골고루 번져가고 있었다. 순간 소독기 안에 갇힌 컵들이 생각났다. 멸균되고있는 새벽의 시작은 저녁때면 온갖 균들에 찌들어 절인 배추처럼 축늘어 지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깨끗한 느낌이다. 우리 삶이란 것이 늘 멸균을 반복하는 재사용 그릇인 것만 같다.


멀리서 한짐이나 되는 폐지를 조그만 수레에 담아 내려오는 어느 할머니의 실루엣이 보인다. 늘 도로 가장자리의 차선을 다 차지한채로 다니는 분이다. 위험할 텐데 하는 생각은 매일 하면서도 이내 그 걱정과 연민의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 팍팍해지는 삶이다. 누구든 다른 사람의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 않고, 내가 가진 시간을 너그럽게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걸음걸이가 하염없이 위험해 보여도 무슨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멀치감치 떨어져 있다. 차량에 탄 운전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할머니의 옆구리를 치듯이 지나간다. 그러나 할머니 만큼은 누구의 생각에도 지배 받지 않는다. 마치 본능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많다. 그들은 늘 무표정하며 뭔가에 쫏기듯 항상 불안하게 보인다. 버스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도 하고, 추운 겨울 중무장한 옷틈으로 빼꼼히 내민 눈들은 알 수 없는 한곳을 향해 멍하니 고정되어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그 어디에도 함께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근길의 그들은 혼자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개를 숙이고 수레를 끄는 할머니 역시 철저하게 자기세계만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혼자만의 세계. 폴오스터의 어둠속의 남자는 이 세상에 무한한 능력의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역시 무한한 수만큼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 각자에게 배당된 우주가 무한한 능력의 신에 의해 셀수없이 무한하고 다양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순간 내가 죽어버린다 한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배당된 우주가 끝나버리는 것뿐이다. 팍팍한 삶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한하지 않으니 나에게 국한된 이 변질되고 실패한 우주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끝간데 없이 허무해지기 시작하면 끝내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문득 깨진 이빨의 조각이 생각났다. 내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역시나 내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내 몸에 돌아오도록 지붕위로 그것을 던졌어야 했을까. 이빨의 조각이 돌아와 내가 되든, 내가 그 이빨의 조각이 되든. 내가 살아가는 이곳이 현실인지, 내게서 떨어져 나간 생각의 조각들이 현실인지 모를 일이다. 비약하는 생각의 꼬투리를 잡고 다시 버스안으로 돌아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를 생각하며 쪽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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