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5월13일 광주로 가는 버스 안 유리창의 짙은 썬팅을 뚫고 들어오는 5월의 햇살은 전에 없이 강렬했습니다. 두 번째의 광주민주화 묘역 방문. 그 어느 때보다 광주의 모습이 설래고 기대되는 하루였습니다. 그날 5월의 햇살이 마치 37년전 광주를 내리쬐었던 그 햇살처럼 강렬할 것같다는 일종의 기대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 처음 갔던 작년은 평범한 주말이었습니다. 그날도 햇살은 몹시도 강렬했습니다. 한산한 묘역에 몇 명의 사람들만 참배를 하고 있었지만 그곳의 공기를 지배하는 묵직한 과거의 시간들이 처음 방문했던 나의 심장을 뛰게했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가 더 특별한 것은 지난 몇개월간 숨막히게 달려온 격변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 역사에는 알 수없는 자정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의를 무참하게 짓밟는 잔인한 권력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래서 마치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간 것처럼 순간 암울해 보여도 역사는 대자연처럼 쓰레기더미와 온갖 오물을 걷어내고 옳은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2017년 5월의 광주는 기분좋은 기운이 시내 곳곳의 공중에 유쾌한 재잘거림으로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때이른 무더위로 인해 덥긴했지만 그런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묘역에 도착하니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로 추념문과 기념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당하게 서있는 기념탑아래 수많은 시민들이 단체로 참배하기 위해 줄을 서있었습니다. 행사요원의 안내로 시작된 참배는 5분도 채 않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의 벅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준비해간 꽃을 헌화하고 짧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간 37년전의 망월동과 죽어간 수많은 광주시민의 치열했던 항쟁의 순간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스쳐갔습니다. 매캐한 최루탄과 시민을 향했던 계엄군의 서늘한 총구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철저히 고립된 채로 광주는 그야말로 섬이었던 그 여러날, 우리 중 그 누구도 광주의 진실을 모르던 그때 시민들은 광주시민의 명예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들의 소중한 목숨을 금남로에 주저없이 뿌린 것입니다. 그 결의가 수많은 무덤들 앞에서 온몸을 에워싸는 것같았습니다. 어느 곳의 어느 묘지가 이렇듯 오래도록 전율스런 간절함의 한기를 느끼게 할 수있을까 싶어졌습니다.
구묘역의 비장함은 더욱 더 단단했습니다. 그날의 그 모습 그대로 묘지는 낡고 무심한 세월에 바랬지만 묘비에 새겨진 열사들의 당당함은 37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은 결기로 남아있었습니다. 지나간 내 삶의 우유부단함과 무지의 부끄러움이 서있던 나를 휘청거리게 했습니다. 뜨거운 것이 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죽음을 넘어에서 읽었던 상상할 수 없는 참담한 불의함에 뜨겁게 맞선던 그들앞에서 나는 그저 한줌의 먼지처럼 보잘 것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맹렬한 투쟁이 6월의 항쟁을 이끌었고 촛불혁명에 불을 붙여 이제나마 무언가 나라다운 나라가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거운 빚더미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 빚을 안고 나 역시 작가 한강이 말한 것처럼 내안의 무언가가 깨끗해지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요즘입니다. 내가 그곳에 없었음에도 이렇듯 정화된 느낌이 드는 것의 놀라움은 그들이 흘린 피의 가치에 다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비록 어둡고 참담한 감옥에 우리의 몸이 갇혀있으나 자유의 종이 한없이 울리는 민주세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확신을 갖고 이 어려움을 이겨나갑시다 - 5.18당시 최후변론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