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실리테이션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항상 최선을 다한다.'
퍼실리테이터가 가지는 신념 중의 하나이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어느 면을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단지 관점을 바꾸는 것 뿐인데, 효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먼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치자. 이 때 관찰자가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라는 관점을 갖고 그를 바라보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원망하게 되기 쉽다. 이 때 그의 태도에 부당함이 느껴지고, 관찰자의 마음 속에 그의 부당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일게 된다.
그 원망과 분노는 관찰자의 발언 내용, 말투, 눈빛, 표정, 자세 등에 고스란히 나타나게 된다. 상대방이 원망과 분노를 품은 태도로 자신을 대할 때 이를 좋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그 사람 역시 적대적인 감정이 생기고,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대응을 하게 된다.
관찰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으면서 방어적이고 공격인 반응을 하는 것에 더욱 못마땅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 역시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이다. 이렇게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이 나쁜 역동의 시작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명백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럴 것은 아니다.
관찰자의 시각 또는 관점이 이 악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에는 무슨 일이 생겨날까?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못하고 있어 보일 때에도 긍정적인 관찰자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퍼실리테이터는 이런 긍정적인 관찰자이어야 한다. 퍼실리테이터의 중립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를 품고 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므로, 일이 제대로 되어 가지 않을 때의 상황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 뿐이다.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나쁜 태도를 지닌 사람일 수 없다. 그러므로 관찰자에 원망이나 분노가 발생할 이유가 없다.
평온한 마음으로 그 관찰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경우 반드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필자의 퍼실리테이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그 사정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만약 그 방법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그에게는 또 게으른 사정이 있는 것이 된다.
이 때는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하면 된다.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무엇인가요?"
퍼실리테이터의 중립은 바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 것이 명백한 데, 어찌 일부러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보라는 것이냐? 이는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진정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 가능하다.
헤겔은 '진리는 전체다.'라고 말했고,
니체는 '진리는 없다. 관점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아니냐는 결코 전체가 될 수 없으니 진리가 될 수 없다. 또한 니체의 관찰처럼, 그 인식은 하나의 관점일 뿐 진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관찰자에게 원망과 분노가 일게 된 것은 자신의 인식이 옳다(진리)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자기가 옳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견해와 상황에 있는 타인은 그릇된 것이 된다. 따라서 그릇되 보이는 그의 행동에 분노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보면 관찰자가 화를 내는 것은 단지 그가 상황을 잘못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퍼실리테이터는 항상 참여자의 관점에 서 보려는 태도를 지닌다. 여러 참여자의 여러 관점을 초대하여 작은 전체지만, 전체를 보게 하려고 돕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작은 진리에 합의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