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필연적 불일치의 해결
사람은 매 순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한다. 대충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은 최선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의식이 돌아오면, 지금 몇시지? 하고 묻는다.
최선의 선택을 위한 질문이다.
6시.
'조금 더 자야지.' 라는 선택을 한다. 조금 더 자는 것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최선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6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6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하지만, 잠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잠이 최선이고, 책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책이 선택이다.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잠은 피로회복이 더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선이고,
책은 교양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선이다.
건강이 최고이니 운동 또한 최선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눈은 감은 채 일어나지 않고 누워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에게는 그 것이 최선이다. 모두 그만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매우 자의적이어서 그 것을 최선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시각이 가능하다.
하지만 최선이라는 판단이 본인 말고 또 누구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묻는다면, 실로 본인 말고는 그 최선을 최선이라고 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는 정말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6시에 일어나지 않고 잠을 더 자는 것은 그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보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에 비하여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고 그리하여 그는 최선을 다한다고 볼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점에서 자신이 가진 건강 상태, 지식, 가치관, 과거의 경험을 모두 동원하여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상황이 달라지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책, 운동 또는 다른 선택이 옳다고 한다면 그는 그 주장하는 사람의 건강, 지식, 가치관 등 그의 조건에 따라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누구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최선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는 그 선택이 참이라는 의미가 된다.
'잠을 더 자는 것이 나의 삶에 가장 유리하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이다.
독서를 선택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독서를 하는 것이 나의 삶에 가장 유리하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매순간 자신의 삶의 진리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참인 선택은 의견이나 주장의 형태로 타인과 만나게 된다. 진리이므로 타인에게 어떤 요청을 하 정당성을 지닌다. 즉 스스로 옳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옳은 것을 타인에게 주장하여 함께 실현하고 싶어한다.
'6시면 일어나야지.'라고 주장하거나,
'아침에는 책을 읽는 것이 최고지.'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운동을 해야지,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어딨어.'하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일컬어진다.
사회는 바로 이 여러 주장을 다루어지는 장이다.
서로의 주장은 스스로에게는 참이요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을 철회하거나 바꾸는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불성실함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
더 많은 사고와 더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 신중한 선택을 한 사람이고 따라서 그 선택에 대한 확신과 견고함이 타인에 비하여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는 타인에게는 더 고집센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더 많이 사고하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더 강하고 확고한 주장을 펼치게 된다. 게다가 그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면 그는 자신의 옳음을 더 강하게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다를 때, 어느 한 사람에게 자신의 진리를 포기하라는 요청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상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최선을 포기하라는 것은 배반적이고 모순적이다. 당사자는 이 문제를 스스로 풀기 어렵다.
이렇게 진리들이 모여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장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이다.
한 사람이 진리의 주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각가의 옳음을 주장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퍼실리테이션이라 부른다.
각자의 현재 주장들에게 잠정성을 부여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잘못된 전제는 없는지, 빠뜨린 사실은 없는지, 더 확인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인지, 각 주장을 실현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이다.
그리하여 당사자끼리 주장이 맛설 때는 잘 되지 않았던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가능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각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므로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가질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은 항상 최선이지만, 항상 미성숙한 선택(premature judgment)이 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인 집단은 그 속성상 항상 의견과 주장의 불일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때 최선을 다하여 선택한 결과물인 각자의 주장을 스스로 굽히는 일은 최선을 포기하는 것이어서 너무 어렵다.
퍼실리테이터가 중립자의 위치에서 전제, 관점, 정보, 결과 등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만나게 되면 구성원은 새로운 최선의 선택과 주장, 진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치된 선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선택을 집단지성이라고 부른다.
생각보다 자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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