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기욱 Dec 20. 2020

쿠퍼 철학 세미나 - 소통 담긴 철학

하이데거 - 존재와 언어, 가다머 - 선입견, 데이빗슨 - 소통의 자비

저의 철학 구독 채녈은
플라톤 아케데미 TV, 도올TV, 예도TV, 사색실천, 정진우, 라카니언프랙티스, 구연상, 두철수, 철학과 굴뚝 청소부(시나페홀로-철학하다), 충코의 철학(https://www.youtube.com/channel/UCUV9bHklegmYbdt091TNvjA), The School of Life, CrashCourse 등입니다.
최근에는 예도TV와 충코의 철학을 즐겨들었습니다.

그 동안 쿠퍼는 백승영 교수, 백상현 교수, 김준산 선생님, 하상복 교수, 전대호 강사, 김만원 교수, 우상준 강사 등을 초빙하여 헤겔,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칸트, 라깡, 센델, 바타유, 하버마스, 루만 등을 다루면서 소통의 깊은 영역을 탐색하고 사유를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충코는 얼마 전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을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개념을 간명하고 깔끔하며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쿠퍼 철학 시리즈의 강연을 요청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수락을 해주셨습니다.


조직개발 컨설턴트, 소통에 관심있는 사람, 퍼실리테이터, 코치들이 들으면 좋을 만하고, 충코님이 정리 가능한 철학자와 주제를 함께 논의하여 아래와 같이 정했습니다.




충코님은 독일에서 줌으로 접속하여 강연할 계획입니다. 1시간 정도 강의하고 30분은 질의응답, 30분은 후속 토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질의응답과 후속토론은 제가 퍼실리테이션합니다.


코로나 사정에 따라 일부 강의장(쿠퍼숲)에서 소수의 오프라인 참여도 함께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온라인으로만 진행할 가능성이 높네요.


 



아래 글은 충코님이 직접 보내온 강의 내용의 요약 글입니다.



1주차 (2020. 1. 4(월) 19:30~21:30)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함의 의미"


이론상 사람은 혼자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


태어나자마자 무인도에 버려져 죽을 때까지 혼자 산다면 그 사람의 삶에 사람이라곤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에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상 우리의 존재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집, 도로, 회사 등의 공간이나 음식, 연장, 전자기기 등의 사물들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숨결을 찾을 수 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그 안에서 인식하지 않고는 결코 공간과 사물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에 이를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를 특정한 사양과 모양을 갖춘 객관적인 사물로서만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컴퓨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장치, 다른 사람들이 공유한 게시물을 볼 수 있는 장치, 누군가가 만들어낸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장치이다.


하이데거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음’이 우리 삶의 근본 조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화되고 과학화된 일상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잊어간다고 주장한다. 잊혀져 가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되살리는 것은 단지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더욱 정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2주차 (2020. 1. 11(월) 19:30~21:30)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언어에 대한 고찰"


누구나 말을 하고 말을 듣는다.


그러나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듣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말은 본래 생생한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배가 고프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내가 생생하게 느끼는 배고픔을 표현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말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잃은 채 상투적으로 사용된다.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정치인의 말은 지나치게 상투적이어서, 그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저 ‘국민’, ‘최선’ 등의 형식적인 낱말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말은 사람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감각도, 어떤 감동도 전달해주지 못 한다.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말이 사태에 대한 이해를 열어밝히는 기능을 갖고 있으나, 때로는 이해를 은폐하고 우리를 거짓과 몰이해 속으로 이끌기도 한다고 말한다. 말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통해 어떤 말들이 진정한 이해를 나타내는 말이고 어떤 말들이 이해를 은폐하는 말인지, 제대로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3주차 (2020. 1. 18(월) 19:30~21:30)
"가다머 – 선입견을 긍정적으로 이용하기"


선입견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나쁜 의미를 갖는다.


선입견은 있어서는 안 될 것, 극복되어야 할 것,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 것 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독일의 저명한 현대철학자 가다머는 선입견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됐으며, 오히려 선입견이 없다면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선입견을 완전히 제거한 깨끗한 이성의 상태에서 사태에 대한 최대로 객관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서구 근대의 이성주의가 낳은 독단적인 선입견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가다머는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건 선입견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선입견들 중 무엇이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입견이고 무엇이 이해를 가로막는 독단적인 선입견인지를 잘 가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인식 역량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하려면 먼저 선입견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의 사고의 전환을 겪어야 한다. 한번 선입견에 대한 가다머의 옹호적인 재해석을 살펴보면서 선입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4주차 (2020. 1. 4(월) 19:30~21:30)
"데이빗슨 – 상호이해의 길, 자비의 원리"


때로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나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의 머릿속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저 사람은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이성적이다.’ 등의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의 현대철학자 데이빗슨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아무리 대규모의 비이성적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비이성적인 믿음의 규모는 그가 가진 합리적인 믿음의 규모에 비하면 매우 작다.


즉,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실 그 사람은 아주 작은 영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합리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데이빗슨의 이 이론을 의사소통의 기술과 접목시켜 보는 게 가능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더 이상의 소통과 토론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내가 사실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똑같은 합리적인 믿음들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나와 그가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다는 것, 그의 생각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견을 조정하고, 협의를 통하여 만장일치나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퍼실리테이터에게 철학자의 사유 어떻게 도움이 되는 지를 알고 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견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이견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견은 어떻게 합의로 진전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https://fb.me/e/20fPeSdjZ


https://www.youtube.com/channel/UCpQcfMBBI_0cPg1V4oHWxiA


매거진의 이전글 현장 관리자가 달라졌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