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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Sep 15. 2022

[Day50-56] 457 단상 in London

presessional 4주차 기록 

2022.08.18 ~ 08.24 

1. 프리세셔널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아무리 공부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라도 4주차쯤 되니 대충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할 지 감이 오더라. 물론 똘똘하고 어린 나의 동기들은 이미 1~2주차에 감을 잡고 더 높은 경지로 훨훨 날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코스가 끝나기 전에 적응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적응을 못했다면 그 다음 주에 있을 코스 졸업시험에서 말 그대로 눈물의 똥꼬쇼를 해야했을 지도...

이제 스터디 따위는 뚝딱뚝딱 


대학생 때 실습이 절반인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다보니 논문과 친해질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이번 코스를 통해 필요한 논문을 어떻게 찾고, 읽고,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매우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특히 Abstract와 Conclusion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굉장히, 매우, 몹시 잘 알게 됐다. (그것만 읽으니까..). 


첫 주엔 교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사실 이후에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정 안 되면 녹음기와 클로버노트, 파파고라는 훌륭한 AI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조금씩 아카데믹한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정상적인 수면시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확보되면 무조건 룸메와 술을 마셨기 때문에 결국 잠이 부족한 건 매한가지라는 건 함정. 


그렇게 금요일, 졸업과제 중 하나인 소논문을 제출하고 "제3세계" 친구들과 학교 안의 펍에서 나름의 전통인 "Friday afternoon drink"를 마지막으로 즐겼다. 예상밖의 빡센 커리큘럼과 낮아지는 자존감에 '이러다 입학도 못하고 자격미달로 쫓겨나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았다. 녀석들이야 내가 없었어도 잘 해냈을 거지만, 나는 저 녀석들이 없었으면 진짜 짐을 싸야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단골 펍 조지IV. 당분간 여기도 안녕. 


이제 정말 최종관문인 졸업시험만 남았다. 고작 3% 남짓한 학생들만 탈락한다지만 그것이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약간의 긴장감은 있지만 뭔가 홀가분한 것도 사실이다. 영어가 꽤나 많이 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고. 

모든 강의가 끝나고 반 친구들과 비장의 기념촬영. 고작 presessional 졸업시험이었지만, 우린 모두 쫄아 있었다. 


2. 전 직장 동료의 방문 

이 주엔 또 하나의 빅이벤트도 있었다. 전 직장 동료가 뒤늦은 신혼여행 차 남편과 함께 런던으로 여행을 오게 된 것. 내가 퇴사할 때 누구보다 슬퍼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런던에 오면 꼭 밥 한끼라도 제대로 먹여보내겠다고 다짐을 했더랬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음주가 졸업시험인지라 바짝 쫄아있던 나는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 그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이 있는 토트넘 홈구장으로 향했다. 한국 여행객들에겐 성지 같은 곳이라 그들이 토트넘 경기를 보러 간 건 당연했고, 나 역시 그들을 핑계삼아 지지난 주에 이어 또 다시 홈경기 관람 티켓을 끊었다. 이로써 개막 이후 홈경기 full출석을 해버린 나. 

이드! 나 또 왔어...이번엔 좀 다르길 기대했으나 여전히 손흥민의 골은 터지지 않았고 토트넘은 졸전 끝에 겨우 승리했다. 잘 좀 하자 닭트넘 새퀴들아..

손흥민과 황희찬이 만나는 경기라 어느 때보다 한국인이 많았던 토트넘 구장. 저 멀리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걸어왔다. 지금도 얼굴만 보면 왠지 모르게 술냄새가 먼저 날 정도로 노는 걸 좋아했던 그녀가, 이제 배에 아기를 품은 위대한 임산부의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걸 보자니 새삼 우리가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 간 애들하고 섞여 애들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사실 난 이제는 더 이상 애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중년에 가깝지. 새삼스러울 일도 없는 것이 새삼스러워 지면서 울적해진다. 

뒷통수에서도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은영아...


같이 한식을 만들어 먹고 웃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문득 회사가 그리워졌다. 단 한 번도 그리웠던 적이 없던, 그리워 할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시간들이 조금씩 미묘하게 아련해진달까. 물론 그 험난하고 비합리적이었던 회사일에 대한 미련은 1도 없지만, 퇴직을 할 당시에도 유일하게 아렸던 건 좋은 동료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내 전 직장은 꽤 괜찮은 회사였는지도? 


지난 번 외삼촌과 사촌동생도 그렇고, 이렇게 가끔 찾아와주는 한국 손님들은 내가 도망쳐 나왔던 곳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확실한 건 나는 기본적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매우 운 좋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투덜투덜 불평하지 않도록 해. 

마무리는 역시 타워브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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