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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Sep 15. 2022

[Day57-63] 457 단상 in London

졸업시험과 파티 

2022.08.25 ~ 08.31 

1. 프리세셔널 졸업 

presessional 졸업시험은 크게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시험으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아이엘츠(영국 토플) 테스트를 대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이엘츠의 규격에 맞게 테스트가 진행되는 것이다. 거기에 석사 과정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능력까지 검증해야하기 때문에 아카데믹한 에세이까지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에세이는 지난 주에 이미 제출했고, 이번 주는 총 3일에 걸쳐 듣기 summary, 읽기 summary, 프리젠테이션, 토론, timed writing(시간제한 에세이 쓰기) 평가를 진행한다. 


먼저 듣기 summary는 20분 짜리 강의를 듣고 강의 내용을 200단어 정도로 요약해 제출하는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나름 아카데믹한 규격에 맞춰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엘츠에 비해 한층 부담스러운 부분이다.읽기 summary는 3페이지 짜리 짧은 소논문을 읽고 5분 내외로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스크립트를 미리 써두고 읽으면 오히려 감점 요소가 되기 때문에 역시 꽤 신경쓰이는 부분이다. 


많은 학생(특히 아시아 학생)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테스트는 토론과 timed writing이다. 애초에 말하기와 쓰기 능력이 박살나서 presessional을 듣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 포함). 타고난 아가리파이터인 나는 오히려 토론보다는 timed writing이 더 신경쓰였다. 실제로 지난 5주 간 내 timed writing 성적은 반에서 늘 꼴찌였다. 

내 timed writing에 대한 튜터의 첨삭. 요약하자면 문법이 박살났고, 구조가 옳지 않으며, 결론도 깔끔하게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전날, 너무나 후달렸던 나는 예상 가능한 질문을 상정해 미리 에세이를 쓰고 그것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전략을 쓰기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제 시간에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 그렇게 꼴딱 밤을 새고 다크서클이 허리까지 내려온 얼굴로 강의실에 입장한 나는, 문제지를 받아들고 쾌제를 외쳤다. 내가 예상한 질문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머리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컨닝페이퍼를 기계적으로 시험지에 옮겼다. 그래서 결과는? 

75점이라고 하면 조금 낮은 점수처럼 보이겠지만 토플로 환산하면 100점 후반대의 아주 괜찮은 점수다. 


아이엘츠 점수로 환산하자면 모든 구간에서 0.5~1밴드가 오른 성적이었다. 당연히 석사 과정이 요구하는 영어 기준을 만족했고, 이정도 성적이면 반에서도 중간보다는 훨씬 높은 성적일 테다. 역시 나는 슬로우 스타터였던 것인가. 5주 간의 힘들었던 시간을 모조리 보상받는 이 기분. 본 석사 과정은 이보다 훨씬 힘들겠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뒤쳐지진 않을 것이란 엄청난 자신감이 샘솟았다. 본 코스도 이대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보자고! 




2. 졸업 파티 

시험 후, 학교 측에서 와인과 핑거푸드를 곁들인 조촐한 파티를 열어줬다. 사실 저마다 과제에 치여서 동료들과 제대로 술 한 잔, 밥 한 번 같이 못 먹었기 때문에 이 파티는 매우 적절하고 센스있는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칭찬해, 팩컬티 형님누나덜. 진짜 형님누나에 가깝지, 나이로는...). 


와인도 그저 그랬고, 핑거푸드도 맛이 없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간만에 런던 날씨도 좋고, 어차피 내일 할 일도 없고, 너무나 오랜만에 아무 고민없이 술 마시며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할 따름이었다. 우리 반 튜터였던 착한 머머리 선생님 Jim과도 기념촬영도 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의 문화 '술자리 게임'도 전파하며 정말 간만에 미친듯이 놀았다. 

아주 맛있는 음식어었다고 할 순 없지만 이 날은 굶어도 행복한 날.


학교가 마련한 파티는 오후 6시30분까지였지만 초저녁에 성이 찰 리가 없었다. 학교 펍으로 자리를 옮겨 2차까지 진행. 좀 마시다 보니 다른 학부생들도 어째어째 섞여가지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자정 넘게까지 아주 추태를 부렸던 것 같은데, 사실 정확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다음 날 확인해보니 내 흐릿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사진도 아주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사진이 다 이딴 식이다. 내 기억 속의 그날도 마치 이런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3. 자체 파티 

그것으로도 모자랐던 나. 우리 반, 남의 반 할 것 없이 지원자를 받아 우리집에서 무려 <세계요리경연대회>를 벌이기로 한다. 참가국은 주최국인 한국을 포함해 일본, 중국, 태국. 처음엔 칠레도 참가하기로 했으나 전날 과음을 한 셰프가 실종되어버린 관계로 기권을 선언한 가운데, 자존심을 건 세계 젊은이들의 뜨거운 요리 컨피티션이 런던브릿지 인근 우리집 집구석에서 시작되었다! 


포문을 연 것은 주최국인 한국. 내가 준비한 요리는 김치찜과 해물파전이었다. 김치찜은 그나마 요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지만 해물파전은 대기업의 힘을 빌리는 부정을 저지르기로 한다. 미리 포장지에서 꺼내둔 비비고 해물파전을 기름을 두르고 튀기는 척을 시전한 나. 맛을 본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Jacob! 너 요리 엄청 잘하는구나?". 굳이 대꾸하지 않기로 한다. 평점 3.5점(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이 꼬롬했다). 

김치찌개처럼 보이지만 나름 김치찜이다. 옆으로 비비고 해물파전을 태연하게 자신이 요리한 것인것 마냥 꺼내는 한국팀 대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시 대기업의 맛은...


이어지는 태국의 작품. 예상 가능하게도 똠양꿍을 준비해온 그들. 하지만 뭔가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똠양꿍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시원한 그 맛이 안 올라온다는 것. 초조해진 그들은 테스코로 달려가 몇 가지 조미료를 사온다. 설탕도 넣고, 라임도 넣고 하더니 기어이 그럴싸한 똠양꿍을 만들어 낸다.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근성 칭찬해. 평점 3.5점(과정은 훌륭했지만 결과는 그럴싸한 것에 그쳤다). 

매우 심각해진 태국팀. 똠양꿍이 쉬운 음식이 아니다. 그래도 선방했어.


세 번째로 중국 팀이 주방에 올랐다. 쓰촨 근처에서 온 셰프들 답게 마라탕을 준비해온 그들. 한국인은 어지간해선 맵다고 하지 않는다고 슬쩍 긁었더니 마라 소스를 들이 붓기 시작하는 그녀들. 맵찔이 일본인들이 코가 매콤해져 연신 재채기를 할 무렵 그녀들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매콤한 탕에서 건져올린 샤브샤브 고기가 일품이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야채들이 국물의 풍미를 더했다. 일본친구들은 맛있다고 하면서도 얼굴은 "야레야레"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대만족. 평점 4.0점(원조 쓰촨음식은 한국의 마라탕과는 또다른 맛을 선사했다). 

요리에 대한 긍지가 매우 높은 나라 중국. 하지만 코리안 보이의 도발에 넘어가 마라 소스를 들이 붓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팀이 주방에 올랐다. "제3세계" 맴버인 타카히로는 그녀의 아내를 경연에 참가시켰다. 그녀로 말하자면 스스로 부업을 요리라고 할 정도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정통파 일본 셰프. 그녀가 준비한 음식은 돈카츠였다. 타카히로는 고작 맥주병으로 고기를 다지는 역할 정도를 맡았다. 비록 용병을 데려오는 반칙을 저질렀지만 결과물은 압도적이었다. 일반 돈카츠와 치즈 돈카츠 모두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머리 속에 루피와 나루토가 뛰어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일본 그 자체의 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오이시'라는 말이 새어나온다. 이것이 오리지널 돈카츠구나. 연돈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만약 이것보다 맛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음식이 아닐 것이다. 평점 4.5점(그렇게 매국노가 된다). 

클라스가 달랐던 일본팀. 신들의 세상이 있다면 그곳의 주식은 돈카츠가 아닐까.


모든 경연이 끝난 후, 지구촌 식구들은 하나가 되어 기념촬영을 했다. 순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기념촬영의 콘셉트는 호스트의 지시에 따라 엄근진, 자유포즈, 그리고 호스트에 대한 예를 표하는 총 3가지 자세로 구성되었다. 

엄격, 자유, 그리고 리스펙.




오늘 이후로 우리는 각자의 전공으로 뿔뿔히 흩어질 것이다. 간간히 연락은 하겠지만, presessional은 이를테면 훈련소 같은 것으로 나의 경험상 결국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연락이 뜸해질 것이다. 어찌되었건 나에겐 마음으로 응원할 또 다른 좋은 친구들이 생겼고, 이 똘똘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저마다 멋진 삶을 설계할 것이다. 언젠간 높은 자리에 올라 뉴스에도 나올 친구들이 생기겠지. 나에게도 그들도 오늘이 좋은 추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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