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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Apr 24. 2022

01. 도망친 자의 변명

핑계없는 무덤은 없더랬다.

2022년 3월 7일.

만 9년 10개월을 다녔던 회사를 퇴직했다.

아직 쓸만한 방송사의 한참 일할 PD 탈주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크게  가지를 궁금해했다.

왜 그만두느냐, 그리고 왜 만 10년을 채우지 않았느냐. (후자는 직장인들에겐 매우 중요).

우선 왜 그만뒀느냐에 대한 대답부터 해야겠다.

※ 읽기 전에 이곳의 [도망친 곳의 낙원] 매거진을 구독하도록 합시다! ※



1. 밑밥깔기 - PD는 정말 좋은 직업입니다.

PD로 일한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 예쁜 연예인들과 말도 섞고 가끔 식사도 할 수 있다는 점. (이건 정말 큰 베네핏이다. 적어도 내겐).

소소하게는 사무직에 비해 꽤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 월급은 먹고살만큼은 됐으며, 밖에선 그래도 아직은 좀 대우를 받는 느낌도 들었다. 알만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을 땐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기도 편했고 특히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게다가 조연출 기간을 이 악물고 버텨내면 메인PD라 불리는 연출자로 진화하여 한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할 권한도 갖는다. 업무 스케줄도 나의 편의에 맞게 세팅할 수 있고, 때론 조연출 후배들이 약간 수발(?) 비스무리한 것도 들어주기도 하고, 작가고 연예인이고 스태프고 내 눈치만 보는 것 같고, 하여간 괜히 뭐라도 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그 댓가가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예쁜 연예인 보미, 김민경 누님. 이제 연출자로 그대들과 함께 하긴 힘들겠지만 부디 행쇼 ㅠㅠㅠ


2. 왕관의 무게는 묵직했다.

그래.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선 뭐라도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술술 풀리는 거 같고, 너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나도 금방 김태호, 나영석이 될 것만 같았고, 무수한 아침마다 샤워기 헤드를 마이크 삼아 남몰래 연말에 있을 백상예술대상의 수상소감을 연습해보기도 했었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가면 환상은 마침내 속성으로 무너진다. 마치 시트콤처럼 사건 사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고, 모두가 내게 해결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물론 누군가와 의논은 할 수 있겠으나 결정과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두 세 번 븅신같은 결정을 하고나면 날 보는 스태프들의 눈빛이 원망과 무시로 바뀌어 있는 듯한 착각마저 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착각이 아니었던 것. 젠장).

"김태호도 나영석도 첨부터 잘했겠어?" 처음엔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방송일이 본격적으로 재미가 없어졌더랬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티라-고 했는데 묵직함을 억지로 버텼더니만 슬슬 몸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초보 메인PD의 하루는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랄까. 총체적 난국이다.


3. 골고루 조금씩 아프시네요.

사실 이게 결정적인 계기인데, 정말로 몸이 조금씩 고장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살이 많이 쪘다. 입사 때에 비하면 거의 15kg은 찐 것 같은데 잦은 밤샘과 잦은 야식, 형편없는 운동량이 복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만과 관련 각종 성인병들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 당장 지난주 방송에 대한 피드백도 무섭고 다음주도, 다다음주도 계속해서 촬영하고 편집해야 한다는 것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한 10년을 버티다보니 다음과 같은 건강검진 종합소견서를 받을 수 있었다. [골고루 조금씩 아프시네요.] 물론 매년 건강검진을 받은 다음날엔 어김없이 편집실행.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어느날 아침, 나는 내 인생에 쉼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일종의 산업재해가 아니었을런지


4. 성장동력을 잃은 업계

이것 역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 TV는 더 이상 비전있는 플랫폼이 아니다. 당장에 수직으로 꼴아박고 있는 광고수익이야 둘째치고 요즘 애들이 TV를 안 본다. 걔들이 10년 뒤 내 월급을 책임질 고객님들인데...

좋아, 요즘 애들이 TV 안 보는 거야 셋째치자구. 세상에, 우리 엄마아빠도 TV를 안 본다. 환장할 노릇이다. 덕분에 제작비는 고정인데 인건비는 늘어나고, 돈이 없으니 퀄리티는 떨어지는데 그것마저 연출탓을 해온다. 물론 내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돈이 없는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게다가 가뜩이나 본사보다 적은 제작비로 업무강도는 두 배로 높아져있는데 누군가 '자기가 만들었으면 어쨌느니, 저쨌느니'하며 날 뒷담화라도 했다는 얘기가 들리는 날이면 멘탈은 바사삭 으스러져 버린다. 앞서 인생에 쉼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그날, 난 이 참에 무슨 일을 하며 살지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해보기로 한다.

뒷담화 들은 다음날.gif


일단은 쉬어야겠고, 마냥 쉬기는 좀 그렇고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나운서 형이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오래 전부터 외국에서 공부하는 게 꿈이기도 했잖아. 노느니 학위도 따고 영어도 공부하면 뭔가 다른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틈틈히 유럽여행도 하는 건 덤이고.'


추후 준비과정을 자세히 공유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만족할만한 학교에서 어드미션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회사에 휴직계를 내기로 한다. 업무와 연관된 해외연수에 한해 휴직을 해줄 수 있다는 사규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임원들은 나의 휴직을 받을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내놓는다.


'아 18! 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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