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것이란 일정한 때를 지나 오래되거나 이용하지 않고 일 년 이상 지나게 된 것이다. 묵은 것과 새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묵은 것은 새것과 헌 것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까.
새것은 사고 나면 묵은 것이 되고 묵은 것은 오래되면 헌 것이 된다. 글제를 묵은 옷 정리라고 정하고 나자 묵은 옷에서 오래되어 헌 옷이 된 것은 버리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서울 변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 갈 처지가 되었다. 이사와 묵은 것 정리라는 핑계로 이사 가기 전에 묵어서 오래된 헌 옷을 정리하려는데 어떤 옷을 버릴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대두된다.
그간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이사는 자주 다녔지만 마음 잡고 묵은 옷을 정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아내가 선전포고 하듯 당신 옷이 우리 집에서 제일 많으니 이참에 옷을 정리하란다.
장롱에 걸쳐 놓은 옷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이 추억과 사연 없는 옷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어떤 옷을 버려야 할지 고민인데 아내는 그런 고민하지 말고 사계절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그냥 버리란다.
지금까지 내가 산 옷은 별로 없다. 내 옷은 거의 아내가 사들인 것이다. 아내가 시장에 갈 때마다 입기 괜찮은 옷이 있으면 사들고 와서 한번 입어 보고 마음에 들면 입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납하겠다며 사들인 옷들이다.
장롱을 열고 옷걸이에 걸린 옷에서 버릴 것을 찾으려니 옷에 애착감이 생겨 버려야 할 것이 없다. 장롱에 걸린 옷에는 직장이나 가정사와 관련한 이런저런 사연들이 연줄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다.
장롱 앞에서 하나하나 옛 추억을 더듬어 가며 남길 옷과 버릴 옷을 나누는데 과거의 추억도 옷장에 다시 남는 것과 밖으로 나갈 것으로 분리가 된다.
아내는 내 추억과 사연은 아랑곳없이 버리자 하고 나는 옷에 깃든 추억을 생각하며 떠나보낼 수 없어 붙들려고만 한다. 장롱에 걸친 옷을 대충 살펴보니 그간 옷을 참 많이 사 업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직장생활 30년을 청산하듯이 묵은 옷들이 하나둘씩 버려지자 옆구리가 휑하니 비어 가는 느낌이다. 옷에 묻은 추억과 사연이 나를 떠나 방바닥으로 마구 떨구어지자 서글프기만 하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묵은 바지는 몸에 맞지 않거나 바지가 넓어 유행이 지난 것과 웃옷은 목이 늘어지고 시대나 디자인이 뒤떨어진 것과 몇 년간 입지 않은 옷은 옷장에서 내리는 기준으로 삼았다.
장롱에서 내릴 옷에 대한 기준을 세우자 장롱 밖으로 나가야 할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장롱에서 옷 하나 내리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살림을 어떻게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옷에 이어 화분과 책과 가구 등 살림살이를 줄이기 위해 버릴 생각을 하면 머리가 혼란스럽다. 아내와 이틀에 걸쳐 장롱에 걸린 옷을 정리하자 외출할 때 어떤 옷을 입고 나가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장롱에서 선택되지 못한 옷은 강보에 둘둘 싸여 옷 수거장으로 떠나갔다. 이제는 옷과 함께한 추억을 붙잡고 싶어도 손을 떠났다. 묵은 옷을 정리하기도 어렵고 힘든데 아내는 그간 어떻게 살림을 맡아서 꾸미고 가꾸어 왔을까.
장롱에서 묵은 옷이 사라지자 남은 옷들이 춤을 춘다. 장롱에 걸린 옷들이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바리 춤을 출 것만 같다. 그간 장롱이 비좁아 숨도 제대로 못 쉬다 여유가 생기자 남은 옷에서 생기가 되살아난다.
강보에 싸여 옷 수거장으로 떠난 묵은 옷들아! 그간 고마웠다. 못 생긴 사람 만나서 사람답게 만들어 주기 위해 비바람 막아주며 고생했는데 이별의 말 한마디 전하지도 못한 채 헤어져서 미안하다.
비록 내 집의 장롱을 떠나 어느 집 장롱에 들어가 새로운 주인을 만날지는 모르지만 나와 헤어지는 것을 원망하지 말고 잘 지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