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의 MBTI는 ENTJ
내가 이 동네에서 가을마다 볼 수 있는 장관이라고 꼽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기러기들이 대이동 중에 집결해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에 이 장면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추수가 끝난 논바닥을 가득 메운 기러기떼는 마치 어느 영화에서 본 세기말이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런 장면을 처음 본 터라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세우고 쉴 새 없이 우와 우와를 외쳤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달리기를 하다가 기러기떼를 마주쳤다. 마치 마라톤 경주를 위해 모여든 러너들 같았다.
가을날 우리나라 논밭에서 볼 수 있는 기러기들은 주로 큰기러기와 쇠기러기인데, 이들은 여름동안 러시아, 몽골, 중국 북동부 등 북쪽 지역에서 번식을 한 후, 가을에 번식지를 떠나 우리나라, 일본, 중국 동부 해안 등을 거쳐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겨울을 난다고 한다.
가을에 추수가 끝난 우리나라의 논밭은 북쪽에서 장거리 비행을 하다 내려온 철새들에게는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리니까 내가 본 광경은 장거리 비행에 지친 기러기들이 기력 보충을 위해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더 놀라운 장관이 펼쳐졌다.
요이땅 출발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기러기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리 지어 V자 대형을 만들었다. 난데없이 펼쳐지는 비행쇼에 입을 헤 벌리고 한참을 바라봤다.
철새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방기하다. 어떻게 때가 되면 찰떡같이 알고 이동을 시작할까.
일조시간, 기온과 먹이 변화를 유전적 본능과 학습으로 안다는 객관적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 자체가 매번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나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달인'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다랄까.
우리는 달인을 볼 때 단순히 '잘한다'는 감탄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존경심, 쉽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함이 만들어 내는 신비로움이 있다.
그것이 내게 없는 능력일 때는 더욱더 그렇다. 달인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능숙함이 나의 결핍을 자극하고, 그 간극이 곧 존경이 되고 감동이 된다.
내가 기러기떼를 보고 유달리 감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까.
계획성 있고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는 그들을 보고 나의 결핍이 건드려진 걸까.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달인'스러운 분야가 있다.
아침마다 정확한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남편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말, 방 안에 틀어박혀 몇 시간씩 나오지 않는 사춘기 딸내미에게서 경외감을 느낀다.
몇 시간씩 게임을 해도 지치지 않는 아들내미의 지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신비로움의 향연이다.
나의 '달인'스러움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