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거청년 Apr 10. 2023

프랑스 남자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애매한 관계는 나랑 안 맞아

약 일곱 번째 데이트이자 이 사람과는 거의 마지막일듯한 데이트가 끝났다.

딱히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만났을 때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한국인-프랑스인이라 서로 외국인이라고 해도 공유할 수 있는 언어가 적어도 1.5개는 되었다.

출처가 불명확한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이 관계는 내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딱히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를 할 것도 없었다. ​


처음 그를 만난 건 새해를 맞이하는 New Year’s party에서였다. 새해를 같이 맞이할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들은 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러 각자의 집에 갔다. 그러니 나에게는 친구의 친구가 초대했을 때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그 파티는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런 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새로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그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짙게 남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 후 자신의 친구가 내 친구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그가 나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에 바로 그와 그의 친구, 나와 나의 친구는 맥주를 같이 마시게 되었고 그 이후로 따로 만나 몇 번의 데이트를 했다. ​


IT관련된 일을 하던 그는 코딩과 같이 입력과 출력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뭔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원하는 결괏값을 확실히 얻을 수 있도록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작년부터 시작한 복싱을 잘하기 위해 일주일에 적어도 4번 이상 체육관에 가고, 이직한 회사에서의 중점 프로젝트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 주말까지도 업무 리스트를 확인하며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명확한 사람이 나와의 관계에서는 계속 애매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개월이 넘게 주말마다 만나서 데이트도 했고 이미 연인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딱히 뭔가 연인 같지는 않았다. 그 친구와 연인사이 그 여러 단계 중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뭘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확실히 내가 익숙하던(?) 연인관계로의 발전 방향은 아니었다.


이전까지 내가 익숙하게 들어왔던/경험한 관계들은 이런 식이었다.

[서로 알게 됨 -> 썸 -> 서로 더 잘 알게 됨 -> 연인으로의 발전 또는 서로 각자 갈길을 감]


그리고 연인으로의 발전 단계로 넘어갈 때는 항상 명확하게 '우리 남자친구 여자친구 할래?'와 같은 성격의 이야기를 하고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쪽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스르륵 넘어가는 관계도 많으며, 꼭 명확하게 친구와 연인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며 친구와 연인 그 사이에 여어어어어러 단계 아닌 단계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익숙했던 문화권과 환경을 벗어나면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 이런 것들을 쿨하게 그래 알겠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편하게 느끼냐 아니냐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이런 이야기를 살짝 꺼냈을 때 그는 예전 연인과 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서 지금같이 자유로운 상황을 조금 더 즐기고 싶고 진지한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를 좋아하고 나와의 시간이 즐거우며 현재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이것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런 대답도 솔직히 내가 이 주제를 표면 위로 올리고 직설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말이다.


긴 연애가 끝난 후의 홀가분함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속으로 개소리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매하게 연애의 단물만 빨아먹는 그런 건 난 싫었다. 나는 확실하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관계를 원한다. 생각이 같으면 함께 하는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길을 가는거지​​​.


그래서 이번엔 더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정의되지 않은 관계가 나에게 편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면 친구지 내 친구들과 이런 애매~한 관계를 넘나들며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그러지 않는다고^^…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고 미래가 없는 현재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내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내가 너무 ‘All or nothing’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연인이 되지 않을 거면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현재 자신은 스위스에 온 지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6개월 뒤에 현재 직장을 계속 다닐지, 과연 스위스에 있을 것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자기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엔 부담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 알겠어. 무턱대고 관계를 시작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자세가 책임감 있는(?) 것일 수도 있지. 근데 나는 그런 걸 다 이해하면서 참고 불안해하며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좋지가 않다. 나는 관계를 파이에 비유한다면 작은 한 조각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고 꼭 한 판을 온전히 다 먹어야만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아마도 더 솔직히 말하면……그런 불안함들을 다 안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이 관계가 끝이 났고,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관계에 대해 한 단계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이 대화를 한지 일주일이 지났을까, 그가 ‘주말에 뭐 해? 친구로 같이 놀래?‘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데이트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비워놓지 않은 나는 당연히 이미 다른 친구들과 계획이 있었고 ‘미안, 다음에 놀자 주말에 약속이 있어서!’라고 답했다.


안녕 파비, 잘 가.


​​




작가의 이전글 타지 생활의 외로움은 크리스마스 마켓의 뱅쇼로 달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