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 나라나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는 짧은 시간에 여러 도시를 찍으며 여행하는 것보다 적어도 하루 이틀, 길게는 2~3주 이상까지의 시간을 한 도시, 한 나라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 중에 대단한 곳을 가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게 아니라도 그 시간 동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의미 있으면 그 여행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모로코 여행은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삼인성호,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이다. 최근에 일주일 동안 모로코에서 연말을 보내면서 이 말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모로코 수도인 마라케시에서 바히아 궁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번 여행은 같이 스위스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친구와 함께 왔다. 친구와 나는 딱 봐도 아시아인처럼 생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는 모양새가 전형적인 관광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너네 바히아 궁전 가는 거지? 오늘 거기 문 닫았어~ 그리고 이쪽 방향 아니고 저쪽 방향으로 가야 돼! 진짜야"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며 몇 번이고 이 말을 반복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흔들리는 순간, 갑자기 여행 첫날 공항 픽업 가이드가 당부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지만 이곳 모로코에서는 오픈마인드로 지내지 않는 편이 좋아요. 길가에서 말 거는 사람들 말 절대 믿지 말고 오히려 대꾸도 안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어요."
에이 근데 저 사람이 굳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하지만 일단 모르는 사람의 말이니까 듣지 말고 가던 길로 일단 가보자, 하고 다시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네 궁전 가는 거야? 거기 오늘 문 닫았어!"
아니 이렇게 두 사람이나 똑같은 말을 한다고? 연말이라서 정말 문을 닫은 건가...... 이쯤 되면 그 말이 믿어지기 시작한다. 현지 사람이 두 사람이나 그렇게 알려주는데 그 말을 믿을만하지 않은가.
같이 간 친구에게 '이거 진짜 아니야? 우리 괜히 멀리까지 갔다가 헛걸음하는 건 아니겠지?'라며 반신반의하면서 결국엔 궁전까지 갔다.
그런데 웬걸, 궁전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입구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순간적으로 아찔했다. 만약 우리가 길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의 말만을 믿고 반대방향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살면서 처음 해본 경험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모로코에 간다고 할 때 주변에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 - 인종 차별, 호객 행위, 여성 비하 등 - 덕분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온갖 아시아 국가 언어로 길거리에서 극심한 호객 행위를 당하거나, 내 얼굴을 확인하고 큰 소리로 '차이나 타운!'을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 가끔은 무시로 또 어떤 때는 소리치며 응대하면서 나름 적절히 그 상황들에 대처하며 이겨냈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 것은 그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갑자기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피곤이 몰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대낮에 두 사람이나 똑같이 거짓말을 할 수가 있지? 대낮에 진짜 코 베이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이전에 좋았던 추억과 시간들에 대한 감사까지 옅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여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있었던 작은 경험은 별 다를 것 없는 날이 뜻밖에 만난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특별한 날이 되기도 했다.
여행 시작 전부터 먹어 보려 벼르던 현지 음료 스페인식 오르차타(Horchata)와 파르톤(farton) 빵을 먹으러 12시쯤 카페에 들렀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 메뉴들은 아침에만 나오는 메뉴라 내가 도착한 12시쯤에는 먹을 수 없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포기하고 아메리카노와 크라상을 주문해서 먹기로 했다. 이것도 정말 맛있군 하며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테이블에 기다란 빵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까 내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었다. 원래는 아침메뉴를 따로 점심때 판매하지는 않지만 여행자인 나를 위해 일부러 따로 그 빵을 구워 내어 준 것이었다.
"어? 이거 아침메뉴여서 지금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런데 네가 먹어봤으면 해서 가져왔어! 이게 파르톤이라는 빵이야. 맛있게 먹어~"
먹어 보고 싶었던 빵을 먹어서도 기뻤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외지인인 내게 누군가 그렇게 마음을 내어주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졌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작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날 하루 전체의 기분과 그 나라에 대한 인상까지도 결정짓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따뜻했던 파르톤 빵, 덕분에 더 따뜻했던 발렌시아' 이렇게 기억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를 통해 한 나라와 도시를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겠지라고.
나는 기억할 수도 없는 일상의 조각들에 잠시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느낌과 추억이 따뜻하고 즐겁게 경험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