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도배된 바닥 위로 흑백의 브론즈 조각이 서로 조응하듯 서있다. 신라호텔에 위치한 조현화랑_서울의 단아한 공간이 하나의 화폭이 되어 관람객을 작품 안으로 초대한다. 도심 속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비정형의 구도는 문명 아래 묻혀있던 고대의 유적지를 발견할 때 마주하게 되는 경외심과도 유사한 근원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에 초대되어 어우러지는 관람객, 그리고 노란빛 창문을 통해 작품에 은은하게 퍼지는 빛은 2차원과 3차원으로 구성된 흑백의 추상적 서체에 초월적 시간과 생명력을 더한다.
조현화랑_서울에서 2024년 9월 4일부터 11월 10일까지 진행되는 이배의 개인전 <Between>은 각각 검정과 흰색으로 제작된 높이 2m, 폭 2m70cm의 브론즈 조각을 선보인다. 이는 한쪽 벽면을 채우는 회화 작품의 검정 붓질과 여백의 흰 형태와 함께 공간 속에서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빛을 흡수하는 검정과 반사하는 흰색 사이로 흘러드는 노란 빛은 작가의 고향 청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달집태우기의 달빛을 재현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의례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 타고 남은 달집에서 숯을 집는다. 2022년을 기점으로 이배의 전시가 외부로 확장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기념비적인 규모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면, 이번 전시는 무게의 중심축을 옮겨, 바깥에 위치한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듯 하다.
문명의 중심이 되는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근원을 향하는 이러한 구조의 전시는 2023년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있었던 조현화랑 기획전 <기원, 출현, 회귀>에서도 구성된 바 있다. 맨하탄 중심부에 위치한 록펠러 센터의 링크 갤러리 천장에는 채널 가든이 위치한다. 이곳에 한달간 큰 가마에서 구워서 만들어낸 큰 숯덩어리를 덩어리채 묶어 7m 높이 규모의 이슈드푸 조각을 선보이고, 지하층의 내부 전시장에서는 숯의 표면을 연마하여 검은 빛을 길어낸 이슈드푸가 길게 연작으로 걸렸다. 지상 위로 쌓아 올라간 조각과, 지하의 옆으로 길게 늘어진 회화 작품이 하늘을 향한 인간의 염원과 서로를 잇는 순환적 관계성을 교차시키며 거대한 우주와 같은 숯의 대비를 보여주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으로 빌모트 재단에서 진행된 이배의 개인전 <달집태우기>에서는 한지를 바른 전시장 한가운데 먹을 상징한 거대한 검은색 화강암 조각을 세우고 벽면과 바닥을 가로지르는 붓질 안으로 관람객을 초대하였다. 신을 벗고 다시 신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작품을 관람하게 하는 것은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도 있었다. 전시 공간은 베니스였지만, 뒤뜰에 마련한 노란 빛이 들어오는 달빛 통로 구조물을 통해 바라보는 베니스 운하는 작가의 고향 청도에서 있었던 달집태우기 의례가 치러진 청도천의 달빛을 잇는다. “그림 안으로 들어온 관람객이 물과 연결되도록 의도했다. 일종의 자연과 사람의 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인간은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의 가운데 있는 존재이다. 삶이 형태를 지닌 시각 세계로 존재하는 한편, 그 내면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넓고 깊고 크게 존재한다. … 나는 내면의 세계가 외부를 관리하고 통제하며, 제도화 시켜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내면과 외부를 소통시키는 것이야 말로 예술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배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법론을 꿈꾸기 위해 찾아간 프랑스에서 숯을 통해 아마득하게 잊어버린 근원을 찾았다. 그후 30년 넘도록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여온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 내부로 신을 벗고 들어오길 초대한다. 다시금 근원으로 돌아와서 거친 여정의 먼지를 털고 거룩한 곳에서 새 출발을 입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