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by 겨울밤
행복한 시월이 막을 내리던 그날,
나는 세상의 어느 곳에도 실질적으로 편재되지 못한
나의 초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회사를 빠져 나온 직후부터,
서편 하늘에 번진 석양빛을 이마로 맞받으며
무작정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
지상의 온갖 미물스러움과 속물스러움이
영원히 소멸되는 극단적인 지점이
매순간 나의 발에 밟히는 것 같았다.
배회하며 지나치는 지상의 모든 풍경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신화 속의 시지프처럼
신들의 멸시를 오히려 멸시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부단한 용기가 나에겐 없었을 뿐이었다.

- 박상우, <내 마음의 옥탑방>, 1999년, 47쪽

드디어 해방이다. 지긋지긋한 나인투식스에 얽매이지 않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게 잘 수 있다는 자유. 허둥지둥 일어나 서둘러 머리를 감고 짐을 챙겨 쫓기듯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괜히 아프다는 핑계로 연차를 쓰기 위해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자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 혼자 살아서, 한창 일할 나이에 집에서 빈둥거린다는 책망을 들을 일도 없다.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로 스트레스받으며 죽네 사네 하느라 흰머리만 늘었다. 그다지 내게 중차대한 일도 아니었는데 체내 생태계 교란을 일으킬 만큼, 왜 당시에는 그토록 버겁고 못 견디게 괴로웠을까.


퇴사 후 한 달간은 밤낮이 바뀐 채 OTT를 정주행하며 침대에 누워 꼼짝을 안 했다. 눈이 감기면 잤고, 배고프면 그날그날 입맛이 당기는 대로 시켜 먹었다. 주전부리를 머리맡에 잔뜩 쌓아놔 입이 심심하지 않게 먹고 마셨다. 덩달아 백수 주인과 온종일 함께하게 된 강아지 두 녀석도 간식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대중없이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4주를 푹 잤다. 그러고 나니 자유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제야 살겠다’ 싶었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머리는 멍했다. 늘어지게 잔 잠은 개운함 대신 더 큰 피로를 남겼다. 그나마 출근했을 때 번쩍 들던 정신마저 사라지면서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퇴사한 지 5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간의 시간을 돌아봤다. 5개월간 나는 무얼 한 걸까? 외주 플랫폼을 통해 들어오는 작업을 간헐적으로나마 한 것, 언젠가 새로 입사할 출판사에서 만들어볼 생각으로 구상한 기획안들을 작성한 것, 발행하고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 다시 비공개하기를 반복하면서 브런치에 잡다한 이야기를 쓴 것, 하루 반나절 이상 시청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보면서 덜 걸러진 날 것의 생각들을 기분대로 스레드에 올린 것, 인스타에 올라오는 동물 게시물 혹은 웃긴 영상을 보며 몽글몽글한 기분을 느끼거나 피식거린 것,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 모임에 참석한 것. 사회적 기능을 하지 않고 경제적 활동도 거의 중단한 채, 단조롭고 때론 무료하고 조금은 외롭게 하루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2009년 출판계에 발을 들인 이후 오랜 기간 기획편집자로 살아왔지만, 현실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마흔이 넘어 시작한 독립은 내게 생존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대출금과 각종 공과금, 고정비라는 현실적인 지표들은 박봉의 월급으로 감당하기에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축은커녕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생계를 위해 약해진 체력과 정신력을 끌어모아 매일 원고와 씨름하며 조직 내의 소모적인 갈등을 견뎌내야만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나는 늘 '먹고 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 하긴 해야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돈 걱정을 하다 보면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지난 20년간 내 삶은 크게 나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고됨과 못 견디겠는 것들을 견디고 버티며 나이만 먹었다. 인생의 이벤트가 있을 때면 어쩌면 이번엔 내 삶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늘 제자리였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잠이었다. 현실의 짐을 잠시나마 망각하려 했던 그 행위들이 어쩌면 고통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회피 기제였음을, 그때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최근 5년간 나는 해마다 이직을 했다. 누가 그랬던가, 이직은 사별? 이혼?의 고통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고. 이직의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매년 나는 굳은 각오를 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모아 두각을 드러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렇다고 결과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2020년 초, 내 사주에서 (운이 바뀌는) 대운 시점이라는 그 시기에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이별과 죽음, 독립과 이직을 동시에 겪었다. 마음 둘 데가 없었다. 당시 나는 내 상황을 가족들에게 설명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은 날 오해하고는 질책했다. 서럽고 서운한 마음에 나는 일 년 가까이 가족과도 단절했다. 황무지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시점에 연차가 높다는 이유로 이제 어느 곳엘 가도 팀원이 아닌 팀장 역할을 해야 했던 나는 일에 도무지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어쩜 그리 악재는 한 번에 오는지, 하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출판사 중 하나인 곳에서 대표로부터 성추행을 당해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이직을 해야만 했다.


2021년도에 일하기 시작한 곳은 명성에 비해 내실이 없었다. 유명 저자 한 사람에게 거의 의존하다시피 운영되는 곳이라 편집자들이 자존감을 지키며 독립적으로 일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그곳에서 일 년 좀 넘게 다니던 차에 사실 듣도보도 못한 그러나 일부 편집자들은 알고 있던 출판사에서 채용 공고가 떴다. 잘 모르는 곳이라 망설였는데 면접 때 그 대표가 던진 달콤한 미끼들에 나는 그만 혹하고 말았다. 여기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나는 다시 파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곳엔 제대로 된 출판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출판과 관계없는 오합지졸 몇 명이 모여 노가리만 까더라. 게다가 부장급 편집자라는 한 남자는 자신의 이력을 모두 거짓으로 조작해 입사했고, 내가 입사하기도 전부터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더 형편없는 건, a한테는 b에 대한 험담을, b에게는 a에 대한 험담을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모든 험담을 하고 다니며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인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내가 머리끝까지 빡이 쳐서 면대면으로 얘기하자고 했더니, 알겠다고 답하고는 그날 점심에 짐도 정리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도망을 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뽀록 났기 때문에.) 여기서 끝이면 딱 좋았을 텐데, 남은 오합지졸의 만행 역시 가관이었다. 8개월간 그 꼴을 보며 더 나아질 게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간의 내 시간이 아까워 분을 품고 퇴사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치질하는 멍청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6개월가량의 공백기를 두고 나는 나름의 재활에 들어갔다. 탈출판을 희망하며 쉬는 동안 종종 몸 쓰는 일을 시도했다. 내 인생 통틀어 역대급 난이도였던 쿠팡캠프 알바를 시작으로 여러 물류 일을 했는데 생각보다 내게 소질이 있었다. 답답한 걸 못 참는 급한 성정 탓에 빠른 손으로 일을 척척 해내 정직원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때 그냥 정직원으로 들어갈 걸. 뭔 미련이 남아서였는지, 탈출판하겠다는 경솔한 발언을 번복하고 나는 다시 A라는 출판사에 입사하고야 말았다.


처음 석 달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겉으로는 사람들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편집이나 기획을 내 재량껏 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다만 연봉을 천 만원 가까이 깎아 입사한 게 마음에 걸렸다. 일 년 정도만 고생하면 연봉을 올려 주겠지 라는 혼자만의 희망회로를 돌리며 악착같이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연봉협상 기간이 되었을 때 사장은 날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연봉은 동결입니다”였다. 평소에는 너랑 나랑 나이 차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깍듯하냐 라며 누구보다 격의 없던 사장은 연봉 협상 때만큼은 단호하게 각 잡고 거리를 뒀다. 내가 사실 눈치가 백 단이라 이미 누구누구는 연봉을 올려준 걸 아는데도 올해는 경영 악화로 모든 직원 연봉을 동결한다는 거짓말을 늘어놨다. 연봉을 올려주진 못하더라도 짧고 서툰 격려의 말 정도만 해줬더라면 내 사기가 그리 꺾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날부로 나는 회사에 대한 애정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입사해서 일 년간 계약한 국내 기획 건만 거의 열 건이 넘었고, 모두 국내서만 기획편집해서 책을 출간했는데도, 칠십 퍼센트의 비율로 외서만 작업한 다른 편집자보다 못한 대우에 공평하지 않다는 박탈감이 들었다. 보통 외서의 경우는 이미 완성된 책 형태로 출간한 타국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만 해서 내기 때문에 판권 로열티와 번역비 등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편집자가 작업하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고되지 않고, 번역이 잘 되었나 정도만 원서로 대조하면서 교정교열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집자에겐 득이다. 오히려 출판사에는 손해인 경우가 많은데, 역서는 못해도 2쇄는 찍어야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회수라 해봤자 겨우 마이너스만 아닌 상태인 거지 요즘 같이 이미 볼거리가 넘쳐 책 구매자가 희소한 데다 환율까지 높은 불경기에 외서는 더욱 손해라 고작 재판 2-3쇄 정도 찍어서는 이익이 되질 않는다.


반면 국내서의 경우 저자에게 선인세 개념으로 백만 원 정도의 계약금만 초기 비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만약 편집자가 기획한 책일 경우 편집자가 저자의 집필에 개입하는 범위가 크기도 해서 편집자의 노동 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보통 편집자는 한 달에 한두 권의 책을 동시 진행하면서 기획도 진행하기 때문에 국내서 기획을 속으로는 선호하지 않는다.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일만 많아지고 상대할 저자나 사람이 많아질수록 피곤하고 지칠 뿐이다.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커녕 책임만 가중되는 구조 속에서 내 의욕은 매일 조금씩 깎여 나갔다. 조직에 기여할수록 소모되는 기분은 결국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버틴 시간들은 나를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렸다.


여기까지가 지난 내 5년의 암흑기다.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서 나는 너덜너덜해졌다. 퇴사 후 나는 매일 침대나 소파에 누워만 있었다. 눕고 다시 눕고 또 눕고. 계속 누워서만 지냈다. 발걸음 떼는 일도 힘겨울 만큼 아무런 기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설거지며 청소며 외주 일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이 연재물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보다 오로지 저 자신의 속풀이를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일어서기 위해 기록한 지극히 주관적인 고백이기에, 때로는 객관성을 잃거나 치우친 시선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