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하자 – 1

돈이 없어서 그렇지 생활력은 타고났다고

by 겨울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종종 기회가 되면 알바를 하곤 했는데 뭘 해도 하는 족족 중간 이상은 하긴 했다. 정식으로 계약직 알바를 하기 전에는 대체로 친구들이 하는 알바 대타를 많이 했는데 가는 곳마다 같이 더 일할 수 없냐며 기분 좋게 잡혔다. 대학 때 내가 직접 선택한 알바들은 돈 때문이라기보단 진로 탐색을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수출보험공사나 한국방송공사, 대기업 기획팀, 방송작가, 학원강사 등등을 경험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내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업무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루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방송작가는 지루할 틈이 없었지만 기본적인 노동권이라는 것을 보장하질 않았다. 방송으로 송출되기까지 준비 기간만 일 년이 다 되어 가도록 돈 한 푼 주질 않았다. 아빠한테 받은 용돈으로 하루하루 연명해 나갔다. 당시 섭외 전화 돌리느라 통신비만 20만 원이 넘었지만 청구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청구할 대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에 속한다. 어느 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을 맡아 작업할 뿐 방송사 직원으로 속하지는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인처럼 고용되어 혜택받는 복지 같은 것이 없다. 보통 메인 PD와 메인 작가가 합이 좋을 경우 그 둘을 중심으로 가령 나영석 사단과 같은 팀이 꾸려져 프로그램을 함께 작업하게 될 뿐이다. 더군다나 보통 시상식에서 수상을 하는 작가들은 작가협회에 등록된 메인 작가들로, 통상적으로 경력이 10년 이상 해당한다. 작가협회에 가입하는 절차도 기존 작가의 추천이나 인맥인지 연줄인지가 있어야 한다고 그때 당시에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무튼 메인 작가가 되면 프로그램을 하나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 디렉팅을 하기 때문에 막내작가와 수입이 판자촌에 사는 사람과 한남동에 사는 사람만큼이나 천지차다. 8개월가량 천 원 한 푼 받지 않고 콜하면 택시 타고 달려가거나(택시비도 안 주면서 그렇게 택시 타고 당장 튀어 오라고 하질 않나) 저녁 늦게 헤어졌는데 기획안을 새로 쓰고 프로그램명 수십 개를 목록화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보내라 하질 않나 그래서 담배 쩐내가 가득한 피씨방에서 밤새워 일해야 했던 나는, 어느 날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에라이 엿이나 먹어라’ 하는 심보로 연락을 두절하고 잠수탔다. (얼마나 꼬숩던지.)


당시 제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서열 갈굼으로, 여중/여고에 이어 대학 때도 국문과라 늘 여자들과 무리 지어 다닐 만한 여건이 충분했지만 집단 문화를 극렬히 싫어해 수업도 혼자 짜서 듣고 학식에서 밥도 대차게 혼자 먹던 나를, 나름 성의를 다해 갈구려 하고 길들이려 한 서브 작가의 노력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건물 뒤편으로 불러 똥폼을 잡으며 진지하게 훈수를 뒀는데 쥐똥 만한 애가 꼴에 선배라며 태움을 시전하니 속으로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에게선 권위가 1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소위 남자랑 있을 때와 여자랑 있을 때 말투며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날 회식자리에서 PD에게 술 따르는 모습이 마치 술집 마담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음 날 각 잡고 날 잡도리하는 모습에 속으로 엄청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아,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어릴 적부터 나는 누가 내 앞에서 센 척하면 그 척하는 걸 눌러줘야 직성이 풀리는 약간은 고약한 성미가 있는데, 그래서였는지 중고등학교 때도 일진 언니들에게 종종 이유 없이 맞고 다니던 동생과 달리 나는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고 아무도 날 건드리질 못했다. 성인이 되고는 특히 운전을 하고부터는 사실 운전하는 남자들과 늘 맞짱 뜨고 다니느라 여자들을 상대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기에 그 여자의 잡도리는 지금도 진귀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방송작가를 때려치우고 학원에서 국어 선생으로 일하던 나는 죄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말 같지도 않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동의할 수가 없어서 몇 개월 만에 그것도 접고 결국 출판사로 들어갔다.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니 그나마 이건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들어가긴 했다. 내게 출판사는 가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잘하진 못해도 하다 보니 적성에 맞긴 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만 내는 편집자들처럼 재능이 있진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니었다. 애매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애매하게 하더니, 경력이 쌓일수록 난 이 애매함의 늪에서 점점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탈출판을 꿈꾸고 쿠팡 캠프에서 오륙십 대 아저씨들과 나란히 몸 쓰는 일을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나름 손이 재빠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나도 뭐 하나 돋보이는 게 있구나 싶어 내심 신이 났다. 뭐든 새로운 걸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편인 나는 직장에 다닐 땐 퇴근하고 배달이나 해볼까 싶어 배달앱을 깔았다. 운전 좋아하지, 운동 안 하는데 운동 삼아 조금이라도 걷거나 계단 오르내리지, 소액이어도 돈 들어오지, 시간 제약 없지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내 배달 투잡 소식에 솔깃했는지 나에게 배달 어떻게 하는 거냐며 가르쳐달라고 물었다. 나와 달리 뭐든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남자친구는 새로운 걸 혼자 도전하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배달을 왜 알려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나는 사기꾼처럼 교육비 5만 원을 뜯어내며 배달 어플 설치와 음식 픽업 및 전달 방법 등등을 알려주었다.


이후로도 나는 당근에 올라오는 단기 알바들을 시간이 빌 때마다 했다. 정육점에서도 일하고, 채소 가게에서도 일하고, 직장 다니지 않을 땐 외주 일을 꾸준히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나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