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

<뛰어야 산다>가 날 움직이게 했다

by 겨울밤

12월 11일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하루 중 길면 세 시간 아니면 두 시간 정도 일하는 데 시간을 쓰고, 나머지 중 열한 시간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 게임하며 시간을 보내고, 남은 열 시간은 잠을 자는 데 쓴다. 4개월 반 동안 1386시간을 헛되게 흘려보냈다. 습관이 형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3개월이라는데 4개월이면 어떤 습관을 충분히 체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무언가에 전념했더라면 어느 정도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더는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후회해도 바뀌지 않는다. …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것.”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우연히 <뛰어야 산다> 시즌2를 보게 됐는데, 묘한 쾌감이 느껴지더니 달리고 싶다는 욕구가 불현듯 올라왔다. 헬스장에나 가볼까? 잠깐이라도 뛰고 오자는 생각으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문 앞을 나섰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평소 같으면 나가는 데만 수십 번 고민하다 해가 저물어 결국 집에 주저앉고 마는데 그날은 좀 달랐다. 헬스장에 도착해 <뛰어야 산다>를 보며 같이 달리는 기분을 느꼈다. 불과 석 달 전 호기롭게 찾은 호수공원에서 고작 1분도 달리기 힘들어 한 바퀴 겨우 걷고만 왔는데, 랜선 크루 기분으로 함께 뛰니 속도는 느렸어도 계속 달릴 만했다. <뛰어야 산다>는 이제 내 최애 프로그램이 되어 버렸다. <극한84도> 더불어서.


첫날은 3km를, 다음 날은 4km를, 그다음 날은 5km로 거리를 1km씩 늘여갔다. 이튿날 트레드밀 러닝할 때는 전날 달려서인지 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다 2km 정도 지나니 무겁던 다리가 조금씩 가벼워지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로 처음 1~2km 때는 다리가 무겁더니 그 이후부터는 다리가 풀려 뛰기 편해졌다. 러닝을 하고 나선 팔다리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했다. 뻑적지근했지만 찌릿한 그 기분이 좋았다. 온몸의 세포가 각성되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라인데, 운동을 하고 난 뒤로 4층까지 계단 오르기가 가뿐했다. 계단 오르기가 귀찮고 힘들어 잘 나가지도 않았는데 고작 며칠 운동했다고 몸이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니. 내친김에 바깥에서 진짜 러닝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 내 체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워 집 근처 4km 정도만 돌고 오기로 했다.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 경도가 낮은 업힐 구간이 종종 있어서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을 땐 무리하지 않고 걸었다. 그 외의 구간에서는 천천히 슬로우러닝을 하다시피 달렸는데 예전 같았으면 1분 만에 퍼졌을 몸이 10분이 넘어도 거뜬했다. 집에 되돌아올 때까지 오히려 더 달리고 싶어 아쉬울 정도로 체력이 남아돌았다. 불과 몇 주 전의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 다들 러닝하나?


다음은 좀 더 멀리 지하철역까지 도전해 보기로 했다. 왕복 8km를 뛰다 걷다 하며 완주했다. 일부러 장 볼 걸 생각해서 배낭을 메고 가 중간에 반찬 가게에 들러 반찬도 사 왔다. 집 앞 편의점도 차로 이동하던 내가 이 거리를 걷고 뛰다니, 성취감에 만족스러웠다. 『길 위의 뇌』 저자인 정세희 교수님은 대학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러닝을 한다고 한다. 러닝을 하면 “뇌 유래 신경 영양 인자인 BDNF 농도가 증가하는”데, 그로 인해 “새로운 신경세포가 늘어나고 그 신경세포가 가지치기를 잘하게” 되며, 이는 “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뇌가소성을 극대화시켜 뇌를 싱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디 가서 러닝한다고 말하기로 부끄러울 만큼 고작 몇 주밖에 안 된 러닝 덕에 생활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그간 날 바닥 끝까지 끌어내렸던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됐다. 할 수 없었던 밀린 설거지며 빨래, 바닥을 쓸고 닦고 물건을 정리하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수면 패턴도 규칙적으로 바뀌어 새벽 6시면 눈이 떠졌고, 밤 10시가 넘으면 졸리기 시작해 가급적 1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게 된다.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길었고, 늘어난 시간만큼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자는 생각에 여러 알바도 지원하게 됐다. 다양한 일을 하루를 꽉 채워서 하니 고단하지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목표가 생겼다. 5월에 하프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풀이 가능할 때쯤, 메독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

이게 내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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