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정체

나를 가라앉힌 감정들

by 겨울밤

나는 내 증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한 달 중 일주일 길면 보름 정도 집중이 잘되고 의욕이 넘치던 이유가 정신이 건강한 상태로 돌아와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찾아본 자료에서 내 증상은 우울보다는 양극성 장애에 가까웠다. 나는 이제껏 텐션이 무지하게 업되고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아 땅에서 한 1미터쯤은 떠 있는 것을 조증이라고 생각했지 내 증상이 조증일 거라고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질 못했다.


의사 선생님 A는 내 증상을 (흔히 조울증이라 부르는) 양극성 정동 장애보다는 ‘순환기분장애’에 가까워 보인다고 진단했다. 순환기분장애란 한마디로 양극성 정동 장애의 약한 형태를 의미한다. 한국질병분류정보센터에 따르면, “~F31.-의 양극성 정동 장애나 F33.-의 재발성 우울성 장애라 하기엔 너무 기간이 짧고 경하다”고 나온다. 선생님은 내가 한 달 치 에너지를 일주일 안에 몰아 쓰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게 끌어 쓰면 누구도 버티지 못한다고, 적정한 휴식 시간과 일정한 업무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달 반 뒤에 찾아간 또 다른 의사 선생님 B 역시 경미한 양극성 정동 장애를 의심했다. 검사 결과 불안은 높지 않으나 우울감이 높았고,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당시 나는 나를 실패자이자 쓸모없는 무용한 인간이라 자책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온 듯하다. B 선생님은 원래 다니던 병원에서 내가 처방받는 adhd 약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내 경우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adhd 증상이 없었으며 울증과 조증 등 기분 장애 상태일 경우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먼저 A 선생님으로부터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고작 한 알인데 무기력증이 더 심해졌다. 이틀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잠만 잤다. 결국 나는 다시 원래 먹던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먹던 약이 떨어질 즈음 나는 B 선생님을 찾아가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거의 레벨 1단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정도의 강도 낮은 약들이라 어떤 변화를 체감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새로운 약을 먹은 후로 무기력증이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1월 한 달은 거의 동면 기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종일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고 잠만 잤다. 눈 뜨면 점심이었고 다시 눈 뜨면 밤이었다. 겨울을 느낄 새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잠만 잤다.


내겐 온전한 휴식이 필요했다. 매년 이직과 과도한 업무로 늘 긴장 상태에 놓여 몸이 축났는데 퇴사해서까지 산적한 일로 짓눌린 마음이 무기력을 더 악화시켰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일들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일에서 해방되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어지러운 집도 수납전문가의 도움을 빌려 정리했다. 우선은 드레스룸에 있는 옷들과 침실에 있는 옷장과 서랍장만 정리하기로 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산처럼 쌓인 옷가지들을 전문가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놨다. 말 그대로 혼자선 엄두가 나지 않던 옷 방의 무질서가 질서 있게 정돈됐다. 몇 개월 만에 보는 맨바닥인지, 꽉 차 있던 공간에 여백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납전문가는 혼자 사는 집에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물건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집은 옷은 물론이거니와 이불도, 그릇도, 책도, 각종 잡동사니도 차고 넘친다. 화장대도 두 개, 책상도 두 개, 컴퓨터도 두 대다. 노트북도 맥북과 그램 각각 가지고 있다. 30평이 안 되는 집에 비해 소파는 무척이나 커서 거실의 반을 차지한다. 로봇청소기도 두 대, 무선 청소기 두 대, 유선 청소기 한 대, 스타일러와 반려견 드라이룸까지 부피가 큰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면적은 넓다. 그래도 난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언젠가 입을 것 같아서, 쓸 것 같아서, 필요할 것 같아서 보관만 해뒀다. 심지어 프린트물 하나도 잘 버리지 못해 쌓아두다가 진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어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버리는 데 취약하다. 이날 전문가들 덕분에 옷가지를 얼마나 버렸는지 모른다. 약간 과장해서 1톤 트럭은 되는 것 같다. 살찌고 나서 입지 못하는 수많은 옷이, 언젠가 버린 게 아까워 생각날 것만 같았지만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언제부터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간혹 언제 뭘 시켰는지도 모를 택배들이 도착했고 택배를 뜯는 것조차 귀찮아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방치하기도 일쑤였다. 꼭 필요해서 샀다기보단 필요할 것 같아서 혹은 혹해서 대체로 충동구매한 것들이 많았다. 옷을 정리하다 보니 텍도 떼지 않은 옷이 여럿 발견됐다. 이미 오래 다뤄진 저장강박과 우울의 상관관계를 여러 매체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난 한 번도 내가 저장강박증이라 생각해 보질 않았다. 발 디딜 곳 없을 만큼 온 집안이 물건과 쓰레기로 뒤덮인 공간만이 내가 연상한 저장강박증의 이미지다.


그런데 점점 좁아지는 집안에서 뭔가 모를 갑갑함과 불편함, 불쾌한 느낌을 받으며 어쩌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들다가 그나마 이렇게 생각이 전환되는 걸 보면 아직은 내가 건강한 상태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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