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해
출판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배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편집자는 마흔 초반이면 수명이 끊긴다는 거였다. 이십 대 때 이 일 저 일 전전하느라 스물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판계에 입문했는데 마흔이라니. 그렇다면 내가 고작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십 년인 셈이었다. 그럼, 그 이후엔 뭘 해야 하지? 라는 걱정도 잠시, 하루하루 주어진 일 하면서 일희일비하느라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 십 년만 해보자 싶었다.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딱 십 년이 되면 무슨 답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십 년이 되었을 땐 나에게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이 일 외에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여러 외부 요인으로 여유가 없던 때라 적성을 따지는 한가한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출판계 안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경력은 짧았고, 베스트셀러 하나 내지 못한 무명 편집자라 편집자 개인의 역량을 특히 중요하게 보는 대형 출판사에 들어가기엔 직급이 애매했다. 편집자는 소위 기획력에 따라 몸값이 달라지는데, 내가 신입이던 때만 하더라도 편집자에겐 교정・교열을 꼼꼼하게 하는 능력이 일 순위였던 데 반해 지금은 기획력이 일 순위다. 운 좋게 베스트셀러 한 권 내면 한마디로 초대박을 치면 편집자는 몸값이 올라가고(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올라가진 않는다, 여전히 출판사는 가난하기에) 대형 출판사로 이직하거나 대형 출판사에 속한 임프린트를 자기 이름으로 내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날 환대하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명성이 좀 있는 굵직한 출판사에서 오래 일한 경력 덕에 나이가 많아도 이직이 가능한 정도였다.
마흔셋이 되어서야 처음 휴지기가 생긴 나는 그간 조직에 속해서 일하느라 외주 한 번 해보지 않았던 터여서 막상 외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 교정・교열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일이 들어온다 해도 의뢰인이 만족할지 확신이 없었다. 행여나 경력에 비해 내 교정・교열 실력이 형편없는 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출판인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에 외주 업무를 구한다는 글을 올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외주 교정・교열 업무를 맡기고 싶은데, 함께 보낸 원고 중 일부만 샘플로 작업해서 보내줄 수 있냐는 거였다. A4 1장짜리 교정・교열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30분 만에 작업을 끝내 메일을 보내자 바로 계약서를 첨부한 회신이 왔다. 출판계에서 통상적으로 잡은 단가보다도 높게 제시해서. 그제야 내 실력이 나쁘진 않은가 보다 싶어 안도했다.
저자와 직접 면대면으로, 전화로 수시로 소통해 가며 작업을 했다. 교정・교열이라기 보다는 리라이팅에 가까운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문단을 통째로 뜯어서 재배열하고 개연성 있게 구조화해 윤문하는 작업은 꽤 재미있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 담당자나 저자가 보기에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편집자이기도 했다. 다음 책을 진행할 때 출판사는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을 제시하며 아예 책임 편집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의 경험은 몇 달 뒤, 다시 조직에 들어가 일하는 내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보통 이직하면 조직 시스템을 습득하느라 리듬을 끌어올려 능력 발휘를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이미 변동성이 큰 환경에서 일하던 감각 덕에 예열 기간 없이 현장 적응이 가능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주 일을 하기 전 쿠팡 캠프와 채소 가게에서 분 단위로 쪼개가며 재빠르게 물류를 소분하고 포장하고 적재한 경험 역시, 뭐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근성을 기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뭐든 하면 된다는 근거 없는 용기까지 생겼다. 그래서 다시 경력 공백이 생긴 지금 보이는 족족 알바를 지원하는 이유도 ‘까짓것 해보면 되지, 그게 뭐라고’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시 일하며 절실하게 느낀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걸. 경제적으로 자립할 힘이 있어야 대인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 삶에 생기가 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누워만 있던 시간이 마냥 아깝지만은 않다. 그 덕에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거니까.
잘 버텼다, 잘 버텼어.
지금처럼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