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살다보면 가끔씩 소소한 기적이 일어나고는 한다. 마치 오늘처럼.
어릴 적 나는 내가 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언제나 틀리지 않는 그런 사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좀 먹고 나서는 그것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틀린 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이루지 못한 바람이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요즘은 더욱 그랬다. 나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언뜻 언뜻 보이는 사람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혹은 틀렸다고 하여도 틀리지 않았다고 떼를 쓰는 사람들, 물론 자존심이나 명예, 명분, 혹은 어떤 것들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겠지.
하지만 피로해졌다. 잘 숨겨오다가도 간혹 드러나는 나의 흠결, 그것 앞에서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는 치졸함에 맥이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어가며 날을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삐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지독한 소음으로 잠자리에서 한참 몸을 뒤척이기도 했다.
그리고 피로가 마음에 쌓여 무거운 나날이 이어지는 중에 소소한 기적이 일어났다.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정말 필요한 순간, 필요한 영화가 난데없이 나타나는 때, 기대치도 않은 날, 마음이 마구 울렁대다가 그 무겁고 탁한 것들을 토해내도록 만드는 영회.
그린 북이라는 영화가 있다. 실화라고 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틀린 것을 서로 바로잡아가는 이야기, 조금은 유쾌하고 때때로 왈칵 쏟아지다가, 끝내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도록 하는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싶지만, 내게 그만한 표현력은 없어서 그만두겠다. 다만 살면서 이런 영화를 하나하나 만나고 쌓아갈수록 그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생각해본다.
백인과 유색인종은 화장실이며 식당이며 따로 써야하는 시절, 기품 있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와 거칠고 무식한 이탈리아 백인 운전기사. 아니, 겁 많고 자존심 세지만 항상 백인사회의 모멸에서 괴로워하는 흑인 피아니스트와 매사 정면으로 마주하고 씩씩하며 순수한 백인 운전기사. 그것도 아니면 그냥 어떤 사람 A 와 어떤 사람 B.
영화는 내내 서로에게 지적하기 바쁘다. 그리고 때때로 크게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여가며 서로에게 틀렸다는 말을 한다. 하나는 비아냥거리고 다른 하나는 비아냥거림을 칭찬으로 알아듣고, 이토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내내 보자면 우습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틀린 것을 고쳐나가면서, 틀렸다는 이야기에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지만, 매번 성가시기 짝이 없지만 두 사람은 고쳐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친구가 된다.
요즘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 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어가며, 자신이 혹여 라도 틀렸다고 손가락질 받을까싶어 화를 내는 겁쟁이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대화를 끊고 그저 자신이 틀리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서글픈 사람들, 그보다 더 서글픈 나까지, 이런 것들을 보면 세상은 꽤나 바쁘고 외로울 만 하다.
왜 나이 육십이 되면 이순이라 했던가, 귀가 순해진다니 참 재미있는 말이다. 아직 내 나이가 육십이 되지 않아 저 잘난 맛으로, 제가 옳은 줄 알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변명도 해보지만, 그게 변명일 수는 없고, 그냥 멋쩍은 웃음만 실실 거릴 뿐이다. 겁이 나서 실실 웃는 것으로 눈을 저 만치로 돌리고 만다.
나는 내가 틀리지 않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 틀리면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달게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세상 전부가 어찌되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 “그린 북”에서 나오는 대사 하나. “있잖아요, 세상에는 먼저 다가서는 것이 두려운, 그래서 그런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나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 정말 그럴지도.
추신, 운전기사 아저씨가 욱할 때마다 뜨끔하더라.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래 그렇지, 어떤 정의도 폭력적인 언행을 정당화 할 수는 없지. 폭력은 대화가 아니니까,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는 것 뿐이니까.
...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