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요한 남자는 인기가 없어.” 그 말이 내게는 꽤나 아팠다. 내게는 질책 같은, 아니, 내가 부정당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말이다. 게다가 그때는 어리기도 어려서, 가뜩이나 약해빠진 내게 더욱 버겁기만 했다. 그래, 내게는 오래된 상처였다.
사실, 나는 나름 내 허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란하고, 어설프고, 제멋에 우쭐하다가도 어느 날은 도주 벽이 도져서 세상 가장 좁고 작은 곳까지 내달리는 멍청함. 스스로가 나약한 것도, 금세 지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도 그러려니, 어쩌겠냐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집요하다는 말은 꽤나 뼈가 아팠다. 한동안은 ‘내가 그렇게 집요했나, 그렇게 질척거렸나, 내가 그렇게나 질리는 녀석이었나.’ 같은 물음을 속에서 삭혀가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둔해지는 걸까, 뼈가 시릴 만큼 아팠던 이야기도 이제는 그냥 그런 심정, 아마 뻔뻔해지는 것일 테지. 결국 나는 질척거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질척거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제까지 그래왔으니까. 뼈가 좀 아프다고 바뀔만한 것이 아니었다.
낡은 물건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 헌 옷들도 버리기 위해서는 몇 번을 고심해야 하는 나다. 가끔 엄마에게 이것도 좀 버리고 저것도 좀 버리라고 한소리 들을 때면, 이건 나랑 이런 일이 있어서 안 되고, 저건 나랑 이런 일이 있어서 안 된다며 전부 막아선다. 쓸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의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 짓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분법이다.
나에게 유의미한 것을 끊어내고 놓아주는 일은 나이를 좀 먹었다고 해도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결국 이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이런 일이 사람에게는 좀 더 심하다는 것.
한 1년 전쯤, 어떤 일로 두 달간의 합숙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방을 배정받았는데, 2인 1실, 불편할 것은 없었지만, 편하지도 않은 공동생활. 방에 들어서고, 룸메이트와 첫 대면에서 우리는 둘 다 참으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로도 아마 한 1주일 정도는 방에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둘 다 낯을 가리기도 했고, 각자 자기 일에 바빴다. 그래봤자 나는 빈둥거리는 것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던 룸메이트도 2달이 지나서 헤어질 때는 담백하게 놔주지를 못하고 질질 짜기까지 했으니, 먹은 나이가 참 민망할 뿐이었다. 결국 몇 번을 더 보다가 딴에 담백하게 헤어진다고 황급히 먼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마지막 모습을 남겼다. 억지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이토록 좁고 작은 사람이라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서, 겁도 많고 걱정은 더 많은 사람이라서, 헤어지는 것으로 영영만나지 못할까 두렵다. 이대로 끊어지고 잊어가고 잃어버릴까 싶어서 그게 너무 두렵다. 간신히 얻은 인연이 아무런 감동 없이,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이 무섭다.
정말로 집요한 남자는 인기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질척거리는 남자는 제 구실을 하기엔 많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계에 감동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좀 부족하기로 마음먹었다. 끊어짐에 담백할 바엔 인기가 없고 말지.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얼마 전에 사람들 연락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안부를 물었다. 그냥 시답지 않은 소리를 나누는 것뿐이었지만, 어쩐지 뭔가 든든해진 기분. 강하지 못해서, 단단하지 못해서 길들여지기를 바라고 길들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다소 질척거려도 괜찮지 않나. 그냥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본다.
삶은 생각보다 짧고, 어떤 이는 그보다도 더 짧아서, 나는 그저 저 위의 누군가가 허락하는 순간까지 당신을 붙들고 있는 수밖에.
나의 질척거림에 대해서, 그리고 인기 없음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다가 말이 길어졌다. 피천득 선생님의 말씀으로 급히 마무리해야겠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고 한다.”
그래, 정말 그렇다. 그러니까 그렇다.
추신, 자주는 못 봐도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니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