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 갑자기 집 앞까지 찾아왔냐? 보자고 노래를 부를 때는 맨날 바쁘다고만 하더니." 친구는 실실거리며 별일이라는 듯이 굴었다.
"한욱아, 예전에 그때 기억나냐? 내가 수영이에게 고백하고, 거절당한 뒤에 죽느니 마느니 하면서 쌩난리 쳤던 거."
"기억하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너나 나나 진짜 웃겼는데, 크크크킄, 나는 그때 너 정말 죽을까 봐 걱정했어. 이 새끼 하지도 못하는 소주 한 병을 냅다 다 마시고 미쳐가지고 한 밤중에 차도에 드러눕고, 아 진짜 웃겼다."
"내가 그랬냐?", "그랬냐고? 너 그때 집에 가자니까 그냥 이대로 차에 치여 죽을 거라고 난리 피운 건 기억하냐?" 친구는 잔뜩 신이 나서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크크크킄, 내가 그랬었구나."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랬던 때가 있었다. 사랑이 무너지고 끝나면 죽는 줄 알았던 시절, 허약하고 예민하고, 그래서 촌스러웠던 시절.
"한욱아, 너 혹시 상사병이라고 아냐?", "알지, 그거 갑돌이 갑순이 이야기잖아. 아니다, 이몽룡 성춘향이던가? 아무튼 알지." 친구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모른다. 상사병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하긴 나도 내가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몰랐으니 당연한 거지.
"내가 상사병에 걸렸단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살날이 1년 정도밖에 안 남았단다." 친구는 내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이게 농담도 장난도 아니라는 걸 알고는 말했다.
"야, 무슨 그딴 병이 있었냐? 옘병, 지금 그냥 연애 시작하고 그러면 해결되는 거 아니야? 사랑 때문이면 사랑으로 어떻게 되는 거 아니냐고?" 친구는 나보다도 더 흥분해서는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놈의 미련이라는 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노래 제목 중에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게 있다. 근데 나는 매번 그 노래 이야기가 나오면 발끈해서 따지고는 했었다. "사랑이 어떻게 다른 사랑으로 잊혀져? 그냥 덮혀지는 거지, 가려지는 거고, 어떻게 그게 잊혀지는 거냐?" 반성한다, 그냥 잊혀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부터라도 누구를 만나서 지워지면 상사병도 깨끗이 나을 텐데, 제길.
"야, 수영이, 시은이, 유나, 세영이, 선희 누나, 유민이, 민하, 은형이, 아니면 다른 은형씨? 또 누구 있냐? 아, 이 미친 새끼 뭐 이렇게 많아. 아 씨발 가만히 있지 말고 불러봐. 걔 누구야, 그 조폭 딸내미, 아니면 그 피아노 쳤다던 걔인가, 아, 나 이 새끼 그렇게 사랑 타령하더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친구는 내가 만났던 애들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뭔데?"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야 이 븅신아, 지 죽는다는데, 남의 이야기처럼 하네, 븅신아 너 죽는다고, 1년도 안 남았다며? 니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찾아서 풀어야지! 일단 수영이 어떠냐? 너 아직도 수영이 이야기만 나오면 미안해서 죽을라고 하잖아." 이 새끼 말이 맞다. 근데, 사실 그 짓을 어떻게 할까. 헤어진 옛 연인들, 거기에 고백했다가 차인 이야기까지 다 찾아서 확인할 생각을 하니, 그냥 이대로 있다가 죽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야, 고맙다. 근데, 그걸 어떻게 하냐, 다들 잘 살고 있는데, 심지어 수영이는 몇 년 전에 시집갔다 더라. 아마 지금은 애엄마 되어있을 텐데, 무슨 남의 단란한 가정 도장깨기 하러 다닐 일 있냐. 나는 못한다."
"아~~~~~!!, 이 새끼야, 너 죽는다고, 나 말고 너 말이야. 너 죽는다고."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친구의 말이 귀를 울렸다. '나 진짜 이러다가, 죽겠구나.'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