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by 서량 김종빈

올지 어떨지도 모르는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친구들은 계속 한숨을 쉬거나 혀를 차거나, 그도 아니면 맥주만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다. 좋은 관계도 아니었고, 심지어 사귄 적도 없었다. 미련은 있을지언정 마음은 조금도 없는 이상한 관계였으니까.

시은이는 대학교 3학년 때쯤 연합동아리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너무 뻔한 묘사지만 실제로 그런 애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래저래 나랑은 맞을 친구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애를 그토록 쫓아다녔던 것은 그 외모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나는 제멋대로 마구잡이로 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때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좋았다. 지금에 와서도 도무지 모를 일이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했다. 뭐든지, 어떻게든 해내는 그 정도가 과해서 주변 친구들이 눈살을 찌푸릴정도였다.

심지어 아는 누나들은 내게 정신 차리라고까지 했었다. 왜 그런 애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를 몇 번이고 말렸다. 세상에 이쁘고 착한 애들 많은데 대체 왜 그러냐며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고,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아마 별도 따왔을지 모른다. 될 리 없지만 그 정도였다.

그렇게 한 반년 정도를 따라다녔던 것 같다. 이런저런 식으로 만나기도 했고, 나는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마음을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마저 가졌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가난한 학생보다 차 있는 직장인에게 갔고, 나는 꽤나 비참하게 되었다.

차라리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좋겠다. 그러면 그냥 인연이 아니었구나, 내가 부족했구나 하면 그만이니까.

몇 년이 흘러 "잘 지내지? 종빈아. 나 한국이야." 그녀의 문자였다. 그녀 번호를 안 지우고 있던 나나, 내 번호를 가지고 있던 그녀나, 좀 이상하기는 하다만 나는 답장을 했다. "나야 잘 있지, 유학 갔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돌아왔구나."

그리고 어떻게 지내냐, 시간이 되면 커피나 마시자, 보고 싶다, 같은 문자가 있고, 마지막에 이런 문지가 왔다. "우리 친구지?"

글쎄다, 친구가 뭔지 모르겠다만 그냥 그렇겠다 싶어서 별말 않고 "그렇지." 대답하고는 말았다. 더 이상 만날 것 같지도 않고 볼 것 같지도 않아서 적당히 대답하면 되겠거니 했었다.

근데 그녀는 이후 내게 종종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고, 보통은 하소연, 가끔은 남자 이야기, 대부분은 자기 이야기였다. 내 대답은 매번 적당했다.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말자라는 심정이었으니까. 만일 내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를 가졌다면 좀 더 다정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렇게 한 해가 흐르고, 어느 날 자정이 다 되어 그녀가 내게 갑작스레 전화를 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종빈아, 나 데리고 어디로 도망쳐주면 안 돼?"

나는 잠깐 머리가 멍했고, 좀 지나서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시은아,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 그녀는 몇 달 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데리고 도망쳐달라고 했다. 나는 또 한 번 비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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